"사회운동의 본질은 순수성 회복"새로운 패러다임 수용 못하는 사회적 경직성, 종교적 가치로 바로 잡아야

[한국 초대석] 상명대 박석 교수
"사회운동의 본질은 순수성 회복"
새로운 패러다임 수용 못하는 사회적 경직성, 종교적 가치로 바로 잡아야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누군가가, 그것도 학식과 경륜을 갖췄다고 믿어지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치자. “정당한 절차를 밟아 성립된 좌익 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복원하는 방법으로는 군부 쿠데타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사실이다. 3월 30일 김용서 이화여대 교수(행정학)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의 조찬 간담회 강연에서 펼쳤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이대생들은 강의실앞에서 마스크를 쓴 채 항의 침묵 시위로 답했다. 그들이 들고 있던 피킷에는 ‘피와 땀으로 일궈낸 이 땅의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자는 당신이 부끄럽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이어 4월 2일자 오마이뉴스는 ‘ 군사 쿠데타를 종용ㆍ선동하는 듯한 막가파식의 시대착오적 망언에 어느 누구도 콧방귀조차 뀌지 않을 것’이라고 강도를 높혔다. 현재 이 사건은 민주노총이 김 교수를 내란선동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상태까지 와 있다.

이 사건을 두고 근간 교수신문은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 하는, 그래서 의사 소통할 줄 모르는 한국 지성 특유의 풍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칼럼을 쓴 정대현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의 지성은 전환기적 징후를 보이고 있다”며 “(식자들의) 의사 소통 방식에서 지성적 처방이 아쉽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른바 지식인에게 지성을 호소하는 형국이다.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서로 다른 것들은 극으로 치닫기 일쑤다. 하루가 멀다 하고 펼쳐지는 가두 집회, 그리고 격렬한 충돌 등의 양상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이른바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대표되는 격렬했던 변혁 논쟁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무엇이 남았는가?

- “지금은 카지노 자본주의 시대”

1990년대 동구권 몰락 이후, 보수 대 진보라는 패러다임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양상이 한국 사회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진보적 시민단체 안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성추문 등이 1990년대 후반 들어 사실로 나타나고, 양적으로 팽창일로에 있던 시민단체들이 비민주적 경직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시적으로는 환경, 생태, 페미니즘, 생명공학, 사이버 문명, 세계화, 가족 해체 등 기존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문제들이 21세기 한국의 복잡다단한 정치ㆍ경제 상황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양상이다.

“NGO 활동가들을 위한 수련 프로그램에 자기 성찰을 위한 명상 프로그램을 강의하게 된 것이 출발이었죠.”아내의 조각품들이 한쪽벽을 메우고 있는 거실에서 박석(상명대 중문학)교수가 보이(普伊)차를 권하며 말했다. 흙냄새가 언뜻 스치는데, 마셔 보니 우리 차와는 달리 깊고 진한 맛이 우러난다. 도예가인 아내 김은현(42)씨가 개인전때 선물 받은 중국 운남성에서 나는 귀한 차란다. 유달리 순한 눈매를 하고 있는 박 교수는 3월 13일 창립을 알린 ‘미래 사회와 종교성 연구원’(이사장 서영훈)의 원장이다.

“허울 좋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구호 아래 모든 국가, 기업, 개인은 살아 남기 위해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금은 자본주의 문명의 말기인 카지노 자본주의 시대다.” 홍윤기(동국대)ㆍ정현백(성균관대) 교수,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등 참석자들 앞에서 박 교수가 했던 말이다. ‘카지노 자본주의’. 흔히들 말하는 ‘돈 놓고 돈 먹기’나 ‘천민자본주의’라는 단어보다, 살갗으로 파고 드는 힘이 강하다.

‘미래 사회…’이 21세기 한국의 등불을 자임하고 나섰다. “동구권 몰락이라는 현실적 계기를 맞아, 지금껏 격렬 일변도였던 사회 운동을 종교성의 차원으로 높이자는 거죠.” 종교성이란 인간답게 살고 올바른 가치를 찾자는 의미로, 초월적 색채가 다분한 영성이란 개념과 대비된다. 한국 시민 운동사에서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이 단체는 1990년대에 생긴 시민 운동 프로그램 ‘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부패방지위원회 시민협력팀장 이형용씨 등이 발기인으로 나서, NGO 활동가들을 위한 수련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강력 제기한 것이다. “1년반 동안 1달에 1~2회꼴로 그들의 세미나 등에 참여하다 보니, 2003년 5월에는 기존의 진보적 사회 운동을 발전적으로 검토한 책 ‘대안’도 펴내게 됐죠.” 통혁당 사건 당시 신영복씨와 함께 옥고를 치렀던 성공회대 평화학과 박성준 교수 등 원로들이 고사하는 바람에 그에게 맡겨진 일이다.

- 이 시대 사회운동의 담론은 무엇인가

“동구권 몰락으로 거시 담론, 즉 사회 운동 담론은 실종된 상태죠. 생태, 페미니즘 등 미시담론은 제각각이구요.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대안이 될 수도 없고.” 이들이 답안을 도출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화두를 계속 던질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해결책은 나올테니까요.”

그의 논리속으로 들어가 보자. “자본주의적 생활 양식에 주목해 보세요. 탐욕스레 먹고 음식 쓰레기에 거액을 들이는 나라가 이른바 잘 사는 나라죠. 소비를 해야지만 유지되는 자본주의란 가장 반종교적인 체제죠. 우리는 그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자는 겁니다. 먹거리와 생태계 등에 대해 사색하면서 음식을 천천히 먹는 것도 좋은 실천적 예가 되겠죠.”삶의 본질, 기본적 욕구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할 때 비로소 가능한, 보다 본질적 문제다.

초대 원장을 맡은 박 교수가 유독 주목되는 것은 그 삶의 궤적이 여타 회원들에 비해 다르기 때문이다. 통혁당, 남민전, 민청학련 등 굵직굵직한 시국 사건에 연루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그에게 종교성 혹은 영성이란 필연에 가까웠던 것이다.

밀양 출신인 그는 재수를 해서 서울대 중어중문학과에 79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 생활이란 한편에는 선불교ㆍ노장사상 등 현묘한 중국사상이, 또 한편으로는 부마항쟁ㆍ서울의 봄 등 격렬한 시국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서울의 봄’ 등 시국 시위에도 참여했으나, 본디 삶의 궁극적 목표는 도에 있다고 굳게 믿어 온 그는 1981년 들어 명상에 관심을 두게 된다. “3학년때는 히말라야에 가서 도를 닦으려고도 했죠.” 고등학생 시절에는 미션 스쿨이었던 학교의 영향으로 목사가 되려고 마음 먹기도 했다.

미대 학생이었던 아내도 그 같은 연(緣)으로 만나게 된다. 학교내의 ‘명상요가동아리’가 인(因)이었던 셈이다. 해군사관학교 어학 교관으로 있던 중 휴가를 나와 경복궁에서 은현씨를 만나 프로포즈하게 된다. 기독교도인 아내와 결혼하는 등 다분히 영적인 색채가 짙은 그 독특한 삶의 궤적은 그가 1998년에 쓴 책 ‘박석 교수의 명상 체험 여행’에서 솔직하게 기록돼 있다(모색刊). 유달리 영적인 색채가 강했던 그의 인생이 1997년까지 상세히 기술돼 있는 책이다. 교수라는 신분에 당연히 수반되기 마련인 격식을 훌훌 벗어 버리고 어린 시절부터 당시까지를 가식 없이 기록했다는 점에서, 한편의 독특한 성장 소설을 보는 느낌이다.

- 종교적 순수성 회복을 열망한다

그의 삶은 종교성의 색채가 짙다. 그것은 현재 종교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도 부합된다. 즉, 기복성이나 교세 확장 등 기성 종교가 몰두하기 십상인 팽창주의적 행태를 반성하고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열망이다. ‘미래 사회…’ 일은 가장 현실적이고도 명쾌한 선택이리라.

그의 종교성은 중문학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하는 강의에서도 잘 드러난다. 현재 충남 천안시 상명대에서 그는 ‘중국문화와 사상’, ‘동양 사상과 명상’ 등 두 과목을 가르친다. 특히 전학년 교양 과목으로 돼 있는 뒤엣 것은 전국을 통틀어 유일한 것으로, 힌두ㆍ유ㆍ불ㆍ도교 등을 명상과 수양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법을 궁리하는 강좌다.

또 1998년 그는 ‘새문명아카데미’에서 ‘바라보기 명상’이라는 강좌를 시작, 명상을 생활속으로 안착시켰다. 매주 수요일마다 청담동 진흥아파트 부녀회관에서 20여명의 일반인들을 상대로 펼쳐 오고 있는 명상법 강의는 도시인의 마음을 씻어 주고 있다. 1년뒤에는 인터넷까지 개설해 명상과 관련된 글들을 업데이트중이다.

그는 대학의 일반 교양 과정에 명상을 최초로 편입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신대의 ‘종교와 명상’, 원광대 요가학과의 ‘명상의 이론과 실습’ 등 현재 여러 대학에 개설돼 있는 명상 관련 과목은 모두 그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 한국 진보운동의 새 방향 모색

그러나 또 하나의 길은 정해졌다.한국의 진보 운동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생활과 비전’이라는 이름의 시민교육원을 만들어, 검증된 이론들에 종교성을 부여해 가자는 것이다. 여타 NGO와의 연합 가능성은 그가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다. 2006년에는 틱낫한 스님 등 세계의 영적 지도자들과 만남의 장도 활발히 마련할 계획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매우 행복하다”고 그는 말했다. 단, 자식들 셋이 모두 아들이라 아쉽다는 알 듯 말 듯한 말을 한다. “지탄 받지 않고 이웃 주민들과 어울리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면 돼죠.”현재 사는 광진구에 사교육열이 높은 것은 학부모들의 집단적 조급증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세 아들이 받은 사교육이라곤 바둑, 태권도, 기타뿐이라고.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4-04-27 21:56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