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없다고 주저앉지 말라"CDMA 상용화 이끈 통신한국의 주역, 열정의 칠순 청년리더에게는 비전 못지않게 세부적이고 실전적 전략 중요

[성공의 조건] 서정욱 전 과기부장관
"일이 없다고 주저앉지 말라"
CDMA 상용화 이끈 통신한국의 주역, 열정의 칠순 청년
리더에게는 비전 못지않게 세부적이고 실전적 전략 중요


오래 전 필자의 어머니는 어느 날 전화기 신청 때문에 외박을 하고 들어 오셨다. 녹색 전화기를 분양하는데 워낙 신청자가 몰리기 때문에 그 전날부터 체신부 앞에서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화기란 것은 희귀하기도 했고, 재산상 가치도 있었던 물건이다. 요즘식으로는 아파트를 장만 하듯 했다고 보면 된다.

그랬던 한국이 지금은 이동 통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고 있다. 관련 기술은 물론, 핸드폰 기기까지 수출하고 우리는 지금 그 열매를 즐기고 있다. 한국통신의 선진화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상용서비스의 시작이고 그 주역이 바로 서정욱 전 과기부 장관이다. 그는 무선 통신의 전문가이자, 이런 전문성을 바탕으로 수 많은 업적을 이룬 사람이다. 만약 기술계에 명예의 전당이 있으면 그는 영순위일 것이다.

나는 늘 그의 리더십이 궁금했다. 국방과학연구원 시절부터 신화적인 성과를 많이 냈던 그의 성공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이른 아침 인터콘 헬스장에서 그를 만났다. ‘ 과연 저 분이 7순이 넘은 사람일까?’, ‘저 분에게 노인이란 호칭을 붙일 수 있을까?’ 첫 인상에서부터 그런 느낌을 주는, 그는 청년이었다. 그것도 열정이 넘치고 호기심 가득한 친절한 청년이었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어린 시절과 성장배경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저는 서울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에서 장손으로 태어나 대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2남 3녀 중 장남) 교육자 집안이었고 친척 중에 의사도 있었지요. 주변에는 축음기, 전축, 라디오, 괘종 시계 등 당시에는 매우 귀중한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개구쟁이였고 호기심이 컸던 제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지요. 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뜯어 보았습니다. 물론 다시 조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지요. 라디오 하나로 전 동네 사람들이 방송을 들어야 했던 시절 그런 물건을 망가뜨린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평면 텔레비전이나 고급 핸드폰을 부수는 것 이상의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문한다고 하면 친척 집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사고를 쳤다고 야단을 맞은 기억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학업을 게을리해서 야단을 맞은 적은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 덕분에 균형을 잡게 된 것 같습니다. 중학에 들어 가면서는 본격적으로 무선에 취미를 붙여 라디오도 조립하고 관련 클럽을 만들게 됩니다. 이런 취미는 대학에서의 본격적인 햄(HAM, 아마추어 무선가) 활동으로 이어졌구요.

결국 그는 어린 시절의 취미를 살려 끝내 전공으로 하고, 거기서 성공을 거두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평생을 두고 무선 통신에 관심을 갖고 노력한 결과, 오늘날의 서정욱이 탄생했다. 덕분에 우리는 통신 대국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란 생각이다.


- 어떤 분들의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지금의 제가 있게 된 데는 수 많은 귀인의 도움이 컸습니다. 우선 고 2때 만나 나중에는 장인이 되신 전 KBS 기감 이인관씨가 계십니다. 그 분으로 인해 기술의 중요성과 실사구시 정신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낸 신상철씨 덕으로 공군에 몸담게 됩니다. 무선 기술에 목말라 하던 제가 기술적으로 가장 앞선 공군에 들어가게 된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또 공군에서의 인연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지도 교수였던 저먼 교수 (John P. German)교수님도 제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분 역시 아마추어 무선사이었지요. 그 분은 늘 “ 엔지니어는 정직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잘 해야 한다. 프리젠테이션 스킬이 뛰어나야 한다. 사진을 잘 찍어야 한다. 예능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는 등의 철학을 심어 주었습니다. 보통 엔지니어하면 외곬수 같은 사람을 연상하는데 그 분 덕분에 저는 다양한 곳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훨씬 균형잡힌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어서인지 그는 탁월한 커뮤니케이터이다. 특히 영어로 하는 연설은 탁월하다. 마치 미 대통령의 연설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또 파워 포인트를 사용해 강의 자료를 만드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 위기는 없으犬た?

없을 리가 있습니까? 수 많은 위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학위를 딴 후 국방과학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납니다. 한창 무기의 국산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전자 계통 분야는 선진국에 비해 워낙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포기를 했기 때문에 별 다른 프로젝트가 없었습니다. 다른 분야는 바쁘게 돌아가는데 프로젝트가 없으니 할 일은 없고 한심하더군요. 저는 몇몇 사람들과,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전기를 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연구소에 저와 비슷한 사람이 몇 명 있었고, 오랫동안 아마추어 무선사로 활동한 덕에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연합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분들은 집에 나름대로 고급 기계를 갖고 있었는데 이들을 활용했던 것입니다. 2년간 몇몇 사람과 몰래 자비를 털어 이 일을 진행했고 급기야 무전기 개발에 성공했는데, 여러 경로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됐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희들이 해낸 겁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저는 스타가 됩니다. 이어서 여러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지요. 일이 없다고 주저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없으면 찾아 나서야지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주도적인 사람이다. 완벽한 조건에서 일을 했다기 보다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하는 프로젝트만을 맡아서 성공시켰다.


- 취미는 어떤 것이 있나요?

저는 어려서부터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장난감을 조립하고 조각을 하는 것이 제 취미였습니다. 엔지니어는 책만 읽는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것이 참다운 엔지니어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취미와 직업이 맞은 셈입니다. 또 저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기독교 방송국이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소장했는데, 그곳에 있던 지인에게 LP판을 빌려 복사를 하고 반납을 하는 것이 주요 일과이기도 했지요. 한 때는 제가 여러 곳에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해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는 별 다른 취미는 없습니다. 고스톱도 칠 줄 모르고, 골프도 늦게 배웠는데 영 시원찮습니다. 워낙 할 일이 많았고, 그 일을 좋아해 일과 함께 살아온 것이 제 삶이었지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제 좌우명은 대관세찰 (大觀細察)입니다. 즉, 넓게 보고 세밀하게 살피라는 의미지요. 리더에게 비전이 물론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 못지 않게 그것을 실천하는 세부적인 전략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의 리더들은 말만 그럴 듯하게 하지 실무 경험도 없고 실전적 전략도 없잖습니까? 그래서 10년 이상 만불 벽을 못 넘고 있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간디를 존경합니다. 그가 주장한 ‘ 7대악’ 론을 좋아 합니다. 그를 모델로, 저는 나름의 7대악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극복해야만 한국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안정성 없는 시스템 (system without stability), 윤리 의식 없는 엔지니어링 (engineering without ethics),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기술(technology without safety),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education without reality), 신뢰성 없는 정보(information without reliability), 영속성 없는 개발(development without sustainability), 룰이 없는 게임(game without rules) 이 그것입니다. 단순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점과 모순이 그대로 숨어 있었다. 전문성을 키워 기술적인 성과를 이루어낸 그의 인생 여정이 농축돼 있었다.

KIST 원장, 과기부 차관과 장관을 했다. SK 텔레콤 사장도 역임했다. 민간과 정부, 연구소 경험을 골고루 갖춘 그야말로 ‘ 중원의 고수’이다. 7순이 넘은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서울과학종합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IEEE의 이사로서 해외를 다니면서 활발한 활동도 하고 있다. 다음 달에도 호주와 뉴질랜드의 대학을 순회하며 강의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성공적인 엔지니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할 것, 그 일을 직업으로 할 것,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것, 나이가 들어서는 자신의 경험을 후진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줄 것.

영원한 청년 서정욱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신선한 자극이고 기쁨이었다.

한근태 한국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입력시간 : 2004-07-21 11:38


한근태 한국과학종합대학원 교수 kthan@ass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