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줄 모르는 창작열 "작가는 몸을 던져야"35년 만에 대규모 샤갈 회고전 일궈낸 주역화려한 미의식과 다산성으로 샤갈과 동행

[한국 초대석] 서양화가 이두식 교수
지칠줄 모르는 창작열 "작가는 몸을 던져야"
35년 만에 대규모 샤갈 회고전 일궈낸 주역
화려한 미의식과 다산성으로 샤갈과 동행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것이 어찌 눈 뿐이랴. 무중력의 세계, 꿈과 상상, 그리고 몽환의 바다가에 그의 캔버스에 잠수해 있는데. 그런데도 어느 시인에게는 샤갈의 마을과, 거기에 내릴 것만 같은 하얀 눈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던가 보다.

‘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중략)…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밤에 아낙네들은/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아궁이에 지핀다’. 놀랍게도 40여년 전, 이 땅에는 우리 산하에서 샤갈을 본 시인이 있었다. 김춘수 시인의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그러나 사실, 샤갈이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식의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나의 마을’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건져 올릴 수 있을 뿐.

그렇듯 이 땅에서는 하나의 풍문처럼, 때로는 동명의 패션 제품으로서만 떠돌던 샤갈(1887~1985)이 처음으로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7월 15일,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문을 연 이래 날이 갈수록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색채의 마술사 : 샤갈전(展)’. 삼복 더위 속, 샤갈의 마을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실현되고 있는 현장이다. 다른 관객들과 몸을 부딪쳐가면서도 딸에게 샤갈의 그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는 젊은 주부,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도 아랑곳 않고 스케치북에다 샤갈의 작품을 본 떠 그려 보고 있는 초등학생…. 샤갈의 그림, 그의 꿈 앞에서는 우리의 일상, 짐, 걱정, 어쩌면 존재마저도 옹색한 것이 되고 만다.


- 풍성한 색채 적극 구사한 특유의 화풍

“ 어린 아이들에게는 정서를 북돋울 소중한 경험이겠죠. 정말, 아이들은 꼭 봤으면 좋겠어요!”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두식(57ㆍ홍익대 미대) 교수가 말했다. 이 미술관 세 층을 가득 메운 샤갈의 작품 122점은 보고 또 보아도 새롭다. 1969년 파리 그랑 팔레 미술관에서 열렸던 샤갈의 전작 전시회(474점) 이래, 세계적으로도 35년만에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을 일궈낸 주역이다. 젊은 작가들이 부끄러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화실에 살다시피 하는 선생이 또 일을 낸 것일까.

“ 이전까지 국내서 열렸던 대가들의 전시회라면 피카소나 밀레전이 있었지만, 작품 일부에 불과했죠. 진짜 주요작들만 골라, 거장의 일생을 총체적으로 집중한 것은 이 자리가 처음이죠.” 니스에 있는 샤갈 미술관에도 없는 러시아 소장품까지 망라됐으니, 세계적이라는 말에 값하는 자리라는 것. 평소 국제적 미술관측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 온 큐레이터 서준수씨에게 각별한 감사를 표하는 이유다.

‘ 도시위에서’, ‘ 꿈’, ‘ 비테프스크의 누드’ 등 화집으로만 봐 오던 그림들을 질감도 생생히, 이 땅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임을 요즘 사람들은 다 안다. 오죽하면 “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주말은 피하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이럴 때, 입장료 1만원이라는 말 앞에 으레껏 붙는 ‘ 단돈’이라는 속물적 표현마저 흥겹다. 두툼한 도록(2만8,000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일 다코(Daco) 출판사에서 정교하게 찍어 낸 몇몇 대표작은 15만~25만원 하는 가격임에도 하루 5~6점은 팔려나간다는 주최측의 전언.

지금 한국 사람들은 왜 샤갈에 몰려드는가? “ 양대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등 격변의 시대를 한복판에서 살아 가면서 예술은 대중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철학을 거장적으로 실천한 정신이 한국인의 현실을 위로하는 것 아닐까요?” 샤갈은 참으로 개성적인 방식으로, 시대의 아픔에 ‘ 참여’한 작가였다고 이 교수는 강조한다. 유대계 러시아인이라는 태생적 조건을 ‘십분 활용’해 세계 무대에 우뚝 선 샤갈의 일생이 바로 현재 한국인들에게는 구원으로 다가왔던 것이라며 그는 몰려 드는 관객속에서 말했다.

“ 내 작품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해요.” 국내 첫 소개되는 이번 전시회의 또 다른 백미, ‘유태인 극장 연작 시리즈’(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국립비술관 소장) 앞에서 그는 말했다. 음악, 연극, 무용, 서커스 등 닦은 기예로 대중을 위로하는 장인들의 모습은 샤갈이면서, 동시에 자신이기도 하다는 말. “ 화가는 세 분류로 나눌 수 있겠죠. 엄격한 화가, 위대한 화가, 사랑스런 화가.” 바로 맨 마지막이 샤갈, 모딜리아니, 그리고 자신이라는 것이다. 모노크롬(단색 화법) 등 건조하고도 추상적인 화풍이 지배해 온 한국 화단을 거스르듯, 풍성한 색채를 적극 구사해 온 특유의 화풍을 일컫는 말이다.


- 한국적 미의 원형을 찾아가는데 몰두

조곤조곤 말하길 좋아 하는 뭇 예술가들과 달리 그는 시원시원, 드르륵 한숨에 말한다. 어찌 말버릇뿐이랴. 특유의 미의식에서도 과연 개성적이다. 1997년작 ‘페스티벌’을 보자. 타일을 재료로 해, 풍물놀이의 신명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비잔틴풍의 모자이크로 이탈리아 로마의 3대 지하철역인 플라니오역 구내에 전시돼 있다. “ 홍익대 미대 교수로 있으면서 반년동안을 현지까지 왕복, 제작한 겁니다.” 현재 서울역 세브란스 병원 구내의 아크릴 벽화 ‘축제’는 그 작품의 연장이라고 보면 된다.

“ 색을 극도로 절제하는 일반 한국 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나는 의식적으로 밝음을 추구했다”고 그는 돌이켰다. “ 사찰의 단청, 굿판, 장례식 같은 데서 확인되는 우리 전통 미의식을 보세요. 한민족이야말로 색깔에 아주 탁월하다는 사실이 웅변되지 않습니까?” 마치 샤갈의 색감을 대변하는 듯 하다. 대학 4학년 당시, 원색적 추상화의 대가였던 유영국 선생에게서 영향을 받으면서 단초를 보였던 경향이기도 하지만, 한국적 정황 아래서 충돌이 불가피했다. 억압적 군사 정권하의 1970~80년대에도 대담한 인체화를 추구, 단속 반원을 상대로 1시간 동안 설득을 펼쳐 돌려 보낸 일도 있다.

그러나 대중은 그러한 그림에 환호를 올렸다. “ 유방 등 여체의 곡선미를 이쁘게 그려냈던 내 그림은 대단한 인기를 모았죠. 그러나 그 시절, 나는 술 마시느라 축재는 꿈도 못 꿨어요. 황석영 조선작 송영 양문길 최인호 등 작가, 언론계 사람들과 함께 술로 그 암울했던 시기를 버텨냈고….” 고향이 모두 경상도여서 보다 친했던 김주영 작가와 한 쌍을 이뤄 ‘홍어’ ‘객주’ 등 주요작들을 형상화한 그림 20여점을 최근 전시회의 형식으로 발표한 것은 바로 그 같은 작업의 연장인 셈이다.

1988년 ‘선미술상 수상 기념전’을 계기로, 그는 한국적 미의 원형질을 천착하는 데에 필생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당놀이, 잔칫날, 도시속의 축제 등 생명의 모티프를 수묵화적 여백미를 강조, 고유의 오방색과 모필적 터치 등을 구사해 표현해 내는 작업이다. 2003년 제 1회 베이징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100호짜리 아크릴화 ‘오후’가 좋은 예. 오후의 이미지를 수묵 담채화풍으로 표현한 그 그림은 중국 미술관에서 고가에 매입, 현대 한국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사들였다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여러 면에서 샤갈과 공유하는 면적이 넓다. 생명의 근원을 파고드는 화려한 미의식은 물론, 다산성의 작가라는 점에서도. “ 세상을 뜨기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샤갈처럼 다작을 남겨 전세계에 뿌리고 싶어요.” 그 믿음의 얼개는 이러하다. “ 현대 미술은 대량 생산해야 해요. 매너리즘 극복이란 그 다음의 문젭니다. 졸작이 나오더라도 많이 제작 해야죠.” 후학들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 생각이 많아 화폭으로 못 옮긴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현대 미술은 논리성만 추구하다보니, 생산력이 떨어지죠. 작가는 몸을 던져야 합니다.”

세월을 무색케 하는 그의 열정은 일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최근 아침형 인간 붐이 불기 오래전부터, 그는 철저한 새벽형 인간이다.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셔도 6시에는 꼭 일어나기를 30년 가까이 해 오고 있다고. 평소 침대에 드는 것은 새벽 2시.

잠시도 늦출 줄을 모르는 창작열은 2년전 세상을 아내 손혜경씨에 대한 기억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동화적 감성의 서양화가였던 아내는 그에게 엄격한 충고자였다. “ 잘 팔리는 예쁜 그림만 그린다고 나를 질책해, 새로운 것을 추구하도록 한 장본인이었죠. (나를) 18세에 만나, 26세에 결혼하고, 56살로 세상을 뜬.” 소설가 박완서씨와도 친했던 아내의 모습은 박씨의 ‘두부’에 잘 표현돼 있다. 아내의 자취는 두 아들에 그대로 배어 있다. 도예에 자질을 보이는 하린(32ㆍ뉴욕 주립대 강의), 하?25ㆍ홍익대 경영학4).


- 열정의 작품들, 남미 순회전시회

10월 15일까지, 이 교수의 노력으로 석 달 동안의 첫 서울 나들이를 마친 샤갈의 그림들은 11월 13일~2005년 1월 16일까지 부산으로 옮겨 가, 두 달 동안 감동의 시간을 연장한다. 그 때쯤이면 샤갈의 마을에도, 이 땅에도 눈이 내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잊혀져 있던 시 한 편이 부쩍 주목 받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잠깐, 동명의 문학 작품을 한 편 더 살펴 보자. 소설가 박상우의 초기작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1999년), 그 중에서도 끝 대목이 우리를 붙든다 . ‘붉은 태양과 흰 염소, 그리고 한 다발의 꽃과 두 여인, 올망졸망하게 눈 덮인 마을과 헐벗은 나무들의 풍경들이 아득하게 떠 오르기 시작했다.’ 가난의 1960년대에 김춘수 시인은 가난속 인동(忍冬)의 이미지를, 30년의 세월을 격하여 소설가 박상우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해체돼 가는 관계망을, 샤갈의 작품에서 읽어냈던 것일까.

어느 편이 옳은 지를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샤갈의 세계는 무한히 열려 있으므로. 그렇다면, 가서 확인해 볼 일이다. 샤갈 영감님은 눈망울만으로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빛 바랜 흑백 사진에서 읽어낼 수도 있으니. 이 여름, 서울과 부산의 시립미술관에는 매우 특별한 사랑이 준비돼 있다. 그 곁에는 이두식 교수의 열정이 말없이 지키고 있을 터이다.

지금 그의 대표작은 순회 개인전 형식으로 남미를 돌고 있는데, 에콰도르 국립 미술관까지 가 있다. 뉴욕 57번가의 이름난 화랑 ‘제리 브루스터’에 5년간 전속 작가이기도 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7-29 12:02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