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서방, 1급 첩보 요원 '영웅 만들기'로 날카로운 기 싸움

50년대 러시아 스파이로 활동한 조지 블레이크. 조국인 영국을 버리고 서방 극비 기밀을 빼내 러시아에게 제공한 공로로 최고훈장을 수여받았다.
시간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인가.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MD) 시스템 구축 계획에 대한 반발로 러시아 군부에서 핵전쟁 경고 발언이 나오고, 이란의 핵프로그램이 3차 대전을 유발할 수 있다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황당무계한 논리가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지 얼마 안돼 이번에는 러시아와 서방 간 스파이 전쟁이 호사가들의 입에 올랐다.

냉전이 종식된 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과거의 망령들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신냉전’의 도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전혀 허황된 말은 아닌 듯 하다. 이렇게 된 데는 엄청난 오일달러를 무기로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미국 등 서방에 사사건건 맞서는 러시아의 야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최근 러시아 정부는 냉전시절 대 서방 스파이로 혁혁한 공을 세운 구 소련 스파이들에게 잇따라 최고 훈장을 수여한 뒤 언론매체를 통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들 스파이가 활동을 접은 지 수십 년도 더 됐고, 또 일부는 세상을 떠난 뒤임에도 새삼스레 국가와 민족을 거론하며 이들을 ‘영웅 만들기’에 나선 것은 서방에 한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존심 싸움의 성격이 짙다.

5개월 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70, 80년대 소련을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한 올레그 고르디예프스키에게 명예기사 작위를 수여해 러시아 정부를 자극했다.

60년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ㆍ연방보안국(FSB)의 전신) 요원으로 덴마크에 파견됐던 고르디예프스키는 영국 정보기관인 해외정보국(MI6)에 포섭돼 조국을 배반하고 이중간첩 노릇을 했다.

당시 고르디예프스키의 위장술이 너무나 뛰어나 KGB의 모스크바 본부조차 그의 매국행위가 영국 정부를 속이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그를 런던 책임자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그의 이중간첩 활동을 오히려 도와준 꼴이 된 것이다. 결국 영국에서 은밀히 움직이던 소련 스파이 25명이 그로 인해 체포되면서 영국의 소련 간첩망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냉전시대 조국을 배반한 최고위급 간첩사건으로 기록된 이 일로 인해 러시아 정보기관은 명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고, 지금도 당시의 일을 치욕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 러시아의 아픈 부분을 영국 정부가 정면으로 치고 나오자 이에 대한 맞불로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간첩활동으로 큰 공을 세운 소련 스파이를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서방 언론들은 이를 두고 “스파이들에게 경쟁적으로 훈장 등을 수여해 냉전시대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이는 최근 러시아와 미국, 영국 간 스파이 전쟁이 냉전 시대 이상으로 치열해지는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특히 영국과 러시아는 지난해 11월 전직 FSB 요원이었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런던에서 독살당한 사건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외교관계가 최악이다. 러시아 정보요원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리트비넨코는 지난해 11월 러시아 전직 FSB 요원들과 만난 뒤 ‘폴로늄 210’이라는 방사능 물질에 중독돼 숨졌다.

블라디미르푸틴(왼쪽) 러시아대통령이‘20세기 최고 스파이’로 불리는 조지 코발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하는 기념식에서 군 고위 간부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블라디미르푸틴(왼쪽) 러시아대통령이'20세기 최고 스파이'로 불리는 조지 코발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하는 기념식에서 군 고위 간부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시민권을 획득한 영국인이 런던 한복판에서 피살되고, 그것도 대중의 방사능 오염까지 유발할 수 있는 독극물을 살해도구로 동원한 것은 절대 묵과할 수 없는 범죄이자 주권침해라며 러시아로 도망친 용의자의 신병인도를 요구하고 있으나, 러시아 정부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영국 정부가 신병 인도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런던 주재 러시아 외교관 4명을 추방하고, 러시아도 4명의 영국 외교관을 모스크바에서 맞추방하는 외교전쟁으로까지 비화했다.

러시아가 이번에 훈장을 수여한 스파이는 조지 블레이크와 조지 코발 두 사람으로, 영국이 명예기사 작위를 준 고르디예프스키에 비해 경력이나 출신배경 등에서 전혀 손색이 없다.

블레이크는 똑같이 조국인 영국을 버리고 소련을 위해 영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했고, 코발은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기밀을 빼내 소련의 원폭개발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2차 대전 당시 ‘델마’라는 암호명으로만 불리며 신원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이름이 공개된 것도 처음이다.

영국 정부를 감쪽같이 속이고 MI6 요원으로 위장, 활동한 블레이크는 50년대 독일 동베를린으로 통하는 지하터널에 영국과 미국이 군사용 도청장치를 설치하려 한다는 기밀을 빼내 소련에 넘겼다.

소련은 근 1년 간 미국과 영국에 역정보를 내보내는 도구로 이 도청장치를 역이용했다. 미국 등은 도청장치가 발각된지도 모르고 소련이 내보낸 허위정보를 무려 1년 동안이나 진짜인 것처럼 믿었던 것이다.

61년 신분이 발각돼 체포된 뒤 42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블레이크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66년 유유히 교도소를 탈출, 소련으로 들어가 KGB 대령 등을 지내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경험을 살려 러시아 스파이를 교육하는 역할도 했다. 블레이크가 조국을 배반한 데는 한국과의 인연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이 터진 50년 서울 주재 영국 대사관의 부영사였던 그는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이어 개입한 미군이 “무기력한 한 조그만 마을”을 무차별 폭격하는 것을 보고 서방에 환멸을 느끼고는 공산주의자로 돌변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FSB 대변인은 훈장 수여식 후 러시아 방송에 출연, “그가 가져다 준 정보는 정말 날카롭고 섬세하고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0세기 최고 스파이’라는 극찬을 받는 코발 역시 당시 미국 정부가 그의 간첩활동을 알아 챈 뒤에도 국가적 충격을 우려해 기밀 유출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을 정도로 미국에는 악몽이자 소련에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기밀을 바탕으로 소련은 49년 8월 원폭실험에 성공했고, 45년 뉴멕시코주 사막에서의 실험으로 시작된 미국의 원폭 독점 기간은 불과 4년을 넘기지 못했다.

7일에는 영국 기갑부대 출신 제대군인 피터 힐(23)이 군사기밀 서류를 러시아에 넘겨주려다 현장에서 체포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주영 러시아 대사관과 연계돼 있는 영국 내 러시아 스파이가 30여명이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대대적인 방첩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국과 러시아의 스파이 공방은 한차례 오간 자존심 싸움으로 일단락될 듯하나 스파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어둡고 음습함은 당분간 러시아와 서방이 벌이고 있는 외교전쟁의 키워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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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 한국일보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