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연말 인사가 다가오면서 재계의 시선이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에게 쏠리고 있다.

이 사장이 애플과의 소송전으로 시작해 SK그룹을 등에 업은 하이닉스 반도체의 도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험들을 잘 통과해 명실상부한 ‘이재용 체제’를 완성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1991년 삼성전자 부장으로 입사한 이 사장은 2001년 3월 경영기획실 상무보, 2004년 삼성전자와 소니 합작사 등기이사, 2007년 1월 전무 겸 최고고객책임자(CCO)로 승진했다. 그리고 2007년 1월 전무, 2009년 12월 부사장을 거쳐 지난해 12월 삼성전자의 사장에 올랐다.

이재용 후계구도 어떻게 완성될까

삼성그룹의 사장단 인사를 2주 가량 앞두고 이재용 체제로의 변화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책임경영을 강조하며 수시로 인사를 챙겼던 만큼 12월 초에 있을 인사 규모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이번 인사가 규모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닐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삼성 인사에서 새롭게 떠오를 인물들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는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을 헤쳐 나갈 ‘추진력’과 올 한 해 삼성의 화두였던 ‘투명성’, 그리고 ‘젊음’이 꼽힌다.

세 가지 덕목은 하나의 주제로 관통된다. 바로 이재용 사장 중심의 후계구도 형성이다. 그동안 이건희 회장의 그늘 밑에서 조용히 지내던 것과 달리 올해 여름부터 글로벌 IT업계 CEO들을 만나고 다닌 것도 이 사장 부상의 예고편이었다.

사실 이 사장의 경영권 승계 조짐은 지난해 연말 인사 때부터 가시화됐다. 당시 삼성그룹은 이 사장의 임명과 함께 이른바 ‘이재용 측근’으로 분류되던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을 대표이사 겸 부회장으로 승진시켰고, 강호문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사장은 중국 본사 부회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와 함께 삼성그룹은 젊은 사장들을 대거 임명, 사장단의 평균 연령을 55.8세로 낮췄다. 또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을 세워 김순택 부회장이 이 사장을 뒷받침하게 했다. 최근 장충기 삼성그룹 커뮤니케이션팀장이 미래전략실 차장으로 임명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읽힌다.

하지만 내달 인사와 함께 3세 오너 시대가 구체적으로 열리는 만큼 이재용 사장이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성과가 필요하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이재용 사장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인 게 그동안 애플과의 관계 설정에서 제 몫을 톡톡히 했다는 것이다. SK그룹에 인수된 하이닉스와의 경쟁관계에서도 ‘수완’을 발휘한다면 ‘이재용 체제’로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대 시험대인 애플과의 소송전, 이재용 함박웃음?

올해 이재용 사장에게 가장 큰 시험대는 맞소송을 진행 중인 애플과의 관계설정 문제였다. 지난 4월 애플이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지방법원에 제기한 특허침해소송을 시작으로 삼성전자-애플의 소송전은 시작됐다. 이후 양사는 미국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거의 매달 판매금지 가처분 소송, 본안 소송을 주고받았다.

소송 초기에는 삼성전자가 일방적 수세에 몰렸다. 네덜란드 독일 호주에서 삼성 갤럭시탭의 마케팅과 판매금지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삼성전자 측에서는 “판매금지 결정이 내려진 나라들에서는 매출 물량이 크지 않아 전체 매출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를 되살리기엔 힘이 부쳤다.

위기의 순간, 애플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스티브 잡스의 사망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애플의 새 CEO로 추대된 팀 쿡은 잡스와 개인적 친분이 있던 이 사장을 추도식에 초대했다. 이 사장은 쿡과의 회동을 계기로 삼성그룹의 얼굴로 급부상했다.

지난 10월 19일 잡스 추도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이 사장은 “팀 쿡 최고경영자와 2, 3시간에 걸쳐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애플과 2014년까지 부품공급 계획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악화일로를 치닫던 양사의 관계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 사장은 부품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협력을 결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송에 대한 강한 의지도 보였다. 특허 법무팀도 강화하고 새로운 전략을 내세우며 소송전을 준비한 것이다. 그 결과 지난달 15일에는 호주 연방법원에서 삼성전자는 첫승을 거뒀다.

또 이 사장은 패소했던 독일 법원의 갤럭시탭 10.1 판매 금지 결정에 맞서 수정판 모델을 빠르게 출시하는 민첩성도 보였다. 애플 소송의 중점이 디자인에 있었던 터라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허전문가들은 공생관계인 삼성전자와 애플의 소송전이 결국 상호간 특허료를 지불하는 선에서 합의하는 것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재용 사장과 팀 쿡 최고경영자의 대면이 없었더라도 애초에 끝까지 갈 만한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분석이다.

이런 까닭에 이번 소송전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본 것은 이 사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어차피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끝날 문제였던 데다, 노력에 비해 보이는 성과가 컸던 터라 이 사장의 위상만 높아졌다는 것이다. 과정이야 어쨌든 ‘e삼성’에서 한 차례 실패를 맛봤던 이 사장이 애플과 관계설정을 통해 입지를 강화한 것은 사실이다.

소송전과는 별개로 삼성전자의 3분기 스마트폰 판매량이 글로벌 1위를 차지한 것도 이 사장에게는 큰 수확이다. 스마트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린 이래 ‘1위’ 애플을 넘어선 첫 번째 인물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 2,780만대의 스마트폰을 판매, 애플의 1,710만대보다 무려 1,000만대 이상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반도체에서는 새로운 시험대

SK텔레콤의 품에 안긴 하이닉스는 이재용 사장에게 새로운 시험대다. SK그룹의 하이닉스 인수로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된 쪽이 반도체 사업에서 글로벌 선두를 달리는 삼성전자다.

하이닉스는 지난 10년간 채권단 관리 아래서 큰 투자가 어려웠음에도, 글로벌 2위를 꿋꿋하게 지켰다. 하이닉스는 올해 2분기 기준 D램 23.4%(2위), 낸드플래시 13.5%(4위)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이닉스는 D램 가격 폭락으로 다른 경쟁자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갈 때도 기술력 하나로 잘 버텼다. 향후 SK그룹의 자금 지원을 받게 되면 더욱 폭발적인 성장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업계 2위 하이닉스가 치고 올라올 경우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삼성전자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하이닉스 인수전 기사를 꼼꼼히 챙겨본 것은 최태원 SK그룹 회장만이 아니었다는 얘기도 과장은 아닌 듯 하다.

하이닉스가 그동안 강세를 보였던 D램 이외에 낸드플래시에서도 승부수를 띄운다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반도체 시장의 중심이 D램에서 낸드플래시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특히, 애플이 최근 출시한 아이폰4S에 하이닉스의 낸드플래시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이닉스의 부상이 삼성-애플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쟁이 치열했던 메모리 반도체뿐만이 아닌 비메모리 반도체로 전선(戰線)의 확장 가능성도 삼성전자로서는 부담이다. 하이닉스는 매출 대부분을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거뒀다.

하이닉스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진출하면 삼성전자로서는 직격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60%가 넘는 점유율을 기록하며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에 들어가는 주요 부품이다.

SK텔레콤은 이미 지난 2월 비메모리 반도체 설계업체인 엠텍비전과 합작해 설립한 SK엠텍을 통해 중국 진출을 시도했다. 반도체 생산시설을 갖춘 하이닉스까지 결합하면 SK그룹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드라이브를 걸 수 있다.

지난 8월 임시주주총회에서 하성민 SK텔레콤 사장이 “(하이닉스를 인수하게 될 경우) 통신사업과 연계성이 높은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물론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하이닉스가 내년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만 7조~8조원을 투입할 삼성전자와 전면전을 벌이기는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재계 3위인 SK그룹의 든든한 ‘지원사격’을 받는다면 단기간 내에 삼성전자를 위협할 위치로 올라설 가능성도 충분하다.

업계 2위 하이닉스가 전체 매출 대비 30% 수준이었던 낸드플래시의 비중을 늘리고 스마트폰, 태블릿PC의 호황에 따라 상승세를 타고 있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면 삼성전자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하이닉스가 이재용 사장에게 새로운 시험대로 다가오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