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가정주부가 국정원 직원을 사칭해 내연남으로부터 거액을 뜯어내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국정원 직원을 사칭해 교제하던 남성에게서 수억 원을 뜯어낸 가정주부 김모(38·여)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국가정보원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황당한 말로 피해자 이씨를 속여 거액을 갈취한 것으로 밝혀졌다.

가짜 국정원 직원의 힘

피해자 이씨가 김씨를 만난 것은 8년 전인 2003년 봄 한 인터넷 자동차 동호회에서였다. 당시 이씨는 자신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김씨의 묘한 매력에 끌렸다. 하지만 김씨가 결혼 2년차 주부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평소 김씨의 말이나 행동을 볼 때 그녀가 결혼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이씨는 점차 김씨의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빠져들었다. 김씨도 어딘가 모르게 순진한 구석이 있는 이씨가 싫지 않았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2년이 지났을 무렵인 2006년 7월께, 이씨의 아파트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던 김씨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나의 숨겨진 비밀을 말할 때가 됐다"며 운을 띄웠다. 이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 고백하려고 하는 김씨의 태도에 주목했다. 이 때부터 이씨는 김씨의 기상천외한 최면에 걸려 무려 수년간을 '금전적 노예'로 살아야 했다.

김씨가 밝힌 충격적인 비밀은 "아버지가 국정원 간부인데 대신 업무를 맡았다"는 것. 김씨는 "지금 학교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다. 나는 사실 첩보원"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 충격으로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씨는 자신의 말을 이씨가 그대로 믿자 더 그럴 듯한 거짓말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사랑 믿은 이씨의 등에 칼

김씨가 국정원을 사칭하는 거짓말을 한 이유는 이씨의 재산을 노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국정원 호주 지부장으로 파견가면서 대신 부서 일을 맡게 됐는데 업무 추진비 손실을 메워야 예산을 받을 수 있다"며 손을 내밀었다. 이씨는 사랑하는 여인의 곤란을 해결해 주기 위해 선뜻 돈을 내줬다. 물론 김씨가 돈을 갚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한 것도 이씨가 돈을 내준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김씨는 돈을 갚기는커녕 빌려간 원금도 주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 대한 이씨의 사랑을 철저히 이용했다. 김씨는 더 사랑하고 더 간절하고 더 힘든 것처럼 이씨 앞에서 연기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가 뜯긴 돈은 무려 4억7,000여만 원에 달한다. 김씨는 비밀을 털어 놓은 날 100만원을 받아낸 것을 시작으로 작년 8월까지 4년여 동안 모두 24차례에 걸쳐 돈을 챙겼다. 특별한 직업이 없던 이씨는 김씨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산으로 받은 아파트와 승용차를 담보로 잡히고 사채까지 끌어썼다.

김씨는 이씨로부터 뜯어낸 돈으로 "생활비와 초등학생인 자녀 교육비 등으로 썼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실제로 이씨의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아 돈은 대부분 생활비로 사용된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8년에 걸친 교제 기간에 김씨는 이씨의 아파트와 자신의 집을 오가며 두 남자의 여자로 생활했다. 남편에게는 야근이라고 속이고 이씨와 밀애를 즐겼고 이씨에게는 밤에는 은밀한 업무를 수행 중일 때가 많으니 가급적 연락을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휴대폰 연락도 국정원에서 도감청당할 수 있으니 자세하라고 속였다. 남편이 휴대폰 문자나 통화 내용을 알게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우직한 이씨는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충실히 따랐다.

김씨의 '이중 생활'도 8년만에 꼬리가 잡혔다. 남편이 수시로 많은 돈을 가져오는 아내가 수상쩍어 뒷조사를 한 결과, 이중생활의 전모를 알아챈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 10월 남편에게 이혼당했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씨는 경악했다. 알고 보니 그렇게 애닯아했던 연인은 이미 2002년 결혼해 초등생 자녀까지 둔 유부녀였다. 직업 역시 중고교 기간제 교사와 영어회화 강사로 일했던 게 전부였다.

경찰 조사결과 국정원 간부라던 김씨의 아버지는 국정원 간부가 아닌 인쇄업자로 확인됐다.

수사를 맡은 경찰관은 "김씨는 아직도 자신이 국정원 요원의 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정신적인 문제 가능성을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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