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재벌가는 일반적으로 장자상속 방식으로 후계승계를 도모한다. 아주 가끔 능력 있는 다른 형제가 경영권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그에 따른 '형제의 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형제의 후계승계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데 하물며 그룹의 장자가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딸에게 대권이 넘어가는 것은 더욱 생각하기 힘들다. 재벌가의 수많은 딸들이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뚫고 일어서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그룹은 의외의 경우다. 장남과 함께 장녀가 차기 대권 후보로 심심치 않게 거론된다. 물론 아직 후계승계가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이전이지만 현정담 (주)동양 상무가 주목받는 이유다.

맏딸로 경영능력 뽐내

현정담 상무는 1977년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과 이혜경 부회장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심리학과 경제학을 복수 전공한 현 상무는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MBA)까지 마쳤다. MBA 시절엔 금융회사인 HSBC에서 인턴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현 상무를 포함, 현 회장의 네 자녀는 공교롭게도 모두 스탠퍼드대 출신이다.

현 상무가 동양그룹에 처음 발을 디딘 때는 2006년이었다. 차장 직급으로 동양매직에 입사한 현 상무는 1년 만에 동양매직 마케팅실 실장(부장)을 달고 2009년 1월에는 임원(상무보)에 올랐다. 상무보에 오른 이듬해 12월, 현 상무는 현재의 직급인 상무로 계급장을 바꿔달았다. 실로 초고속 승진이라 불릴만하다. 현 상무는 지난해 7월 새로 출범한 (주)동양의 사내이사로 선임된 데 이어 조직개편을 통해 마케팅실장에서 마케팅본부장으로 격상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다.

현 상무가 마케팅실장에 재직하는 동안 동양매직은 세계 3대 디자인상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비롯해 국내외 디자인 관련 상을 휩쓸며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 이는 브랜드 관리와 디자인 경영을 총괄한 현 상무의 공으로 오롯이 돌아갔다. 또한 동양매직을 젊고 감각적인 회사로 변신시킨 것도 현 상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모친 빼닮은 경영스타일

현정담 상무의 일거수일투족은 외부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대외활동을 최소화하고 회사 일에만 주력하는 현 상무의 성격 때문이다. 다만 섬세하면서도 결정이 빠른 현 상무 특유의 경영스타일은 주목받고 있다.

현 상무가 주축으로 있는 동안 동양매직은 해마다 두자릿수의 매출 상승세를 보여왔다. 마케팅실장을 맡은 현 상무는 동양매직 생활가전 분야의 주 고객층인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판촉방안에 집중했다. 현 상무의 의견을 따라 동양매직은 고객 대상 요리학원, 제품 체험단 등을 통해 고객 늘리기에 나섰고 이는 고스란히 실적개선으로 이어졌다.

현 상무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더불어 빠른 의사결정을 자랑한다. 변화가 많은 생활가전 시장에서 동양매직이 두드러진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임원으로서 회사의 빠른 의사결정을 주도한 현 상무를 꼽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현 상무의 업무 스타일은 모친인 이혜경 부회장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 그룹 내부의 평가다. 고 이양구 동양오리온 창업주의 맏딸인 이 부회장은 남편인 현재현 회장을 돕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경영 참여를 해오며 재계의 파워우먼 중 하나로 인정받아왔다.

남동생 제치고 후계 거론

동양그룹의 후계구도는 예전부터 재계의 주요 관심사였다. 현재 그룹의 총수인 현재현 회장이 창업주의 아들이 아닌 사위인지라 다른 재벌가처럼 장자상속을 이어갈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 때문에 현정담 상무 또한 아무리 경영수완을 발휘할지라도 결국 맏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길 수밖에 없는 여타 재벌가 딸들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평을 들어왔다.

현 회장과 이혜경 부회장은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뒀다. 이중 후계승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사람은 장녀인 현 상무와 동생 현승담 상무보다. 아직까지는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이 뚜렷하게 치고 나오지는 않는 모양새다. 지분에서는 동생이, 직급 및 실적에서는 누나가 약간 앞선다.

지분구조만 봤을 때는 현 상무보가 경영권 승계 순위에서 다소 앞선다. 현 상무보는 동양그룹 지배구조 핵심인 동양레저의 지분 20%를 보유하고 있다. 개인주주로서는 현 회장(30%)에 이어 2대주주다. 동양그룹은 (주)동양을 명목상 사업지주회사로 갖고 있다. 그러나 동양레저가 (주)동양의 지분 34.77%를 소유 실질적으로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동양레저의 최대 주주가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장악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주)동양의 지분은 현 상무가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현 상무가 보유한 (주)동양의 지분은 1.53%로 현 상무보(1.25%)보다 많다. 현 회장(3.14%)과 이 부회장(2.14%) 바로 밑이다. 현 상무는 지난해 동양메이저와 동양매직이 합병, (주)동양으로 출범하는 과정에서 주식 보유분을 높였다. 그 전에는 동양메이저의 지분 또한 현 상무보에게 뒤져있던 터라 지난 합병으로 현 상무의 그룹 내 입지가 점차 강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는 후문이다.

직급 및 실적으로는 현 상무가 현 상무보보다 우위에 있다. 현 상무는 동생보다 1년 빨리 입사한 데다 그간 동양매직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브랜드 인지도를 끌어올려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정수기 판매량은 두 배 이상 늘었고 가스오븐레인지 시장에서는 1위 사업자다. 매출 또한 수직상승했다.

물론 재계관계자들은 장자인데다 경영권 승계의 척도가 되는 지분율에서 앞서는 현 상무보를 차기 후계자로 점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현 회장이 아직 왕성한 경영활동을 하고 있고 두 사람 또한 아직 경험이 부족해 후계구도 완성까지는 시간이 있는 만큼 역전의 가능성도 충분하다. 관건은 현 회장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다. 비상장법인이라 증여가 쉬운 동양레저의 지분 30%를 현 회장이 한쪽에 몰아준다면 그 상태로 상황종료다. 장자상속 일색인 현 재계에서 현정담 상무가 주목받는 이유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