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경영인들의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요즘이지만 현대가의 여성들은 이런 트렌드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다.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대신해 경영에 나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정지이 전무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현대가 여성들은 남편의 내조에만 힘쓰고 있다.

수면 아래서 내조에만 전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대가 여성들 중에서도 정성이 이노션 고문은 특별하다. 그 행적이 철저히 베일에 감춰져 있기는 하지만 국내 광고시장에서 막강한 위력을 행사하는 이노션의 대모로 활발하게 활약 중인 정 고문에 대한 재계의 관심은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전업주부에서 경영인으로

1962년에 태어난 정성이 고문은 1985년 이화여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9월 저명한 정형외과 의사이자 영훈의료재단을 설립한 고 선호영 박사의 아들 선두훈 대전 선병원 이사장과 결혼한다.

결혼 후 20여 년간 다른 현대가의 여성들처럼 전업주부로 선 이사장을 내조하던 정 고문은 2003년 모친인 고 이정화 여사와 함께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이사를 맡으며 재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람들이 정 고문의 존재를 가장 강하게 인식하게 된 계기는 현대차그룹에서 2005년 광고대행사인 이노션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정 고문은 박재범 전 이노션 대표이사와 제일기획 연구소 소장 출신의 박재항 마케팅본부장을 직접 영입하는 등 준비 단계부터 이노션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평가받는다. 회사 설립 이후 정 고문은 오너 전문경영인들을 지원사격하는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충실히 수행, 결국 이노션을 명실상부한 국내 2위 업체로 끌어올렸다.

이노션의 어머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이노션이지만 정성이 고문이 차지하는 역할은 적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이노션의 인테리어, 사내복지 등 꼼꼼한 손길이 필요한 부분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평이다. 사내 식당, 카페 등을 만들어 직원들이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고 온돌방 형태 등 색다르지만 편안한 회의실을 구성하기도 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호평을 들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회사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정 고문의 스타일이지만 인재 채용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는 편이다. 신입사원 면접 때 면접관으로 나오기도 하고 특히 능력있는 여성 인력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후문이다.

제일기획과 양강체제 형성

정성이 고문의 이노션이 등장하기 전 국내 광고시장은 제일기획의 독주체제였다. 삼성그룹 인하우스 에이전시인 제일기획은 1973년 설립된 이래 만년 1위 자리를 고수해오며 2위 기업과 두 배 이상의 격차를 보여왔다. 2005년 설립 당시 광고취급액에서 제일기획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던 이노션은 매년 50% 내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 2009년에는 그 차이를 1조원 이내로 축소시켰고 2010년에는 2,000억원대까지 대폭 줄였다.

지난해에는 양 사의 광고취급액 차이가 다시 벌어졌다. 한국광고협회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등에 따르면 지난해 이노션은 총 3조4,891억원의 광고취급액을 기록, 4조1,532억원을 올린 제일기획에 6,641억원 차이로 뒤졌다. 광고취급액 성장률에서도 29%에 그친 이노션은 42% 성장한 제일기획에 큰 폭으로 밀렸다.

그러나 1인당 취급액(이노션 72억9,945만원, 제일기획 42억8,606만원), 1인당 순이익(이노션 1억6,802만원, 제일기획 9,629만원) 등 각종 생산성 지표에서는 이노션이 제일기획을 넘어섰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더 효율적으로 장사한 셈이다. 이노션이 제일기획과 양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 고문은 최대 광고주인 현대차그룹의 신차발표회는 물론 해외 모터쇼 등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주요 광고의 프레젠테이션에는 직접 코멘트까지 하는 등 그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일했다고 전해진다.

계열사 의존도 커

광고업계 내부에서는 이노션, 제일기획 등 매출의 대부분을 계열사로부터 얻는 인하우스에이전시들이 주도하는 현 시장 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미 10대그룹 대부분이 산하 계열사들의 광고 대부분을 인하우스 에이전시에 몰아주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한 경쟁이 될 리 만무하다는 주장이다. 이노션 또한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이노션은 현대자동차 1,011억원, 기아자동차 428억원, 기타 계열사 3,787억원 등 총 5,226억원을 자사 계열사들로부터 얻었다. 이는 총 매출(6,941억원)의 75%에 달하고 2,584억원을 기록했던 2010년과 비교해도 두 배가 넘는 수치다. 계열사 관련 매출이 100%에 달했던 초창기와 비교하면 많이 떨어진 수준이지만 50% 미만이었던 2008년(44%), 2009년(46%) 때보다는 다시 늘어난 셈이다.

물론 인하우스 에이전시의 특성상 현대차그룹의 실적이 좋아지면 자연스레 계열사 관련광고 수주도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중소규모 광고대행사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사실인 데다가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좋지 않은 터라 정 고문이 받을 부담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인하우스 에이전시는 초기 투자금이 적은데 반해 꾸준히 들어오는 수익은 커 오너일가 자제들의 진입이 특히 많은 업종으로 알려져 있다. 현행법상 광고회사가 한국방송광고공사를 통해 법적으로 10% 내외의 방송광고대행수수료를 지급받도록 제도화돼있는 터라 안정적인 수주물량만 확보되면 상당한 이득이 보장되는 까닭이다.

문제는 지난해 도입된 일감 몰아주기 과세제도가 올해부터 적용될 경우 정 고문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일감 몰아주기 과세제도는 특수관계법인으로부터 정상거래비율(30%)을 초과한 일감을 받은 수혜법인 지배주주와 그 친족 중 사업연도 말 대상으로 수혜법인에 3% 이상을 출자한 대주주로 하여금 대규모의 증여세를 물도록 하는 제도다.

그룹 계열사 매출 의존도가 70%에 달하는 데다 정 고문, 정의선 부회장, 정몽구 회장의 지분이 각각 40%, 40%, 20%에 달하는 이노션은 규제 대상이다. 정 고문 등의 지분을 대폭 낮추지 않을 것이라면 이노션의 계열사 의존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글로벌 광고회사로 우뚝

올해도 이노션은 제일기획과 치열한 접전을 벌일 예정이다. 단순히 광고취급액 경쟁뿐만이 아닌 글로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싸움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노션과 제일기획은 17일 열리는 칸 국제광고제(칸 크리에이티비티 페스티벌)에서 자존심 싸움을 벌일 전망이다. 제일기획이 "5년 연속 칸 국제광고제 심사위원을 배출하게 됐다"고 발표하자 이노션은 "칸 국제광고제의 오프닝과 클로징 갈라(gala: 축하행사)를 국내 업체 최초로 후원한다"고 맞섰다.

이노션은 또한 칸 국제광고제에서 미국 법인의 현대차 벨로스터 캠페인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고 마이크로소프트 애드버타이징과 공동으로 '비치클럽 콘서트'도 열 계획이다. 광고인들의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행사인 만큼 양사의 자존심 대결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흥미로운 점은 양사가 속한 그룹들이 후원하는 대형 스포츠행사들도 올해 열린다는 점이다. 이노션의 현대차그룹은 '유로 2012'를 후원하고 있고 제일기획의 삼성전자는 '2012 런던올림픽 대회'를 후원한다. 두 대회 모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대규모 스포츠 축제들이니만큼 이를 놓고 벌이는 이노션과 제일기획의 홍보대결도 뜨거울 것으로 보인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노션이 글로벌 광고회사로서 얻는 명성이 높아질수록 정 고문이 감당해야 하는 역할도 점차 변할 것이라 보고 있다. 현대가의 여성이라는 특성과 고문이라는 직책상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지는 않더라도 실질적인 오너로서 좀 더 대외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몇 년째 업계 2위에 머무르고 있는 이노션이 비계열사 매출을 늘리고 글로벌 광고회사로 도약하기 위해 정 고문이 감당해야 할 몫이 크다.

● 용어설명

광고취급액: 광고대행사가 광고주(클라이언트)가 의뢰한 광고를 제작하는 데 들어간 비용과 신문·방송 매체 등에 집행한 광고비, 수수료 등을 합한 금액으로 광고업계 순위를 매기는 기준이 된다.

인하우스 에이전시(in-house agency): 대기업 집단 소속 광고대행사로 그룹 내 계열사들의 광고를 전담한다.

● 정성이 이노션 고문

출생 1962년 9월

학력 이화여대 행정학과(1985)

2003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이사

2005 이노션 고문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