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 사외이사제 무엇이 문제인가당초 대주주 견제차원1998년 도입취지 변질오너가 결정권 쥐고권력기관 출신 인사 임명최고경영자 독주 방패막이로

거액의 연봉을 챙기지만 하는 일은 별로 없는 듯하다. 한 해 열 차례 정도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하는 게 주임무다. 그마저도 안 가도 그만이고, 혹 가더라도 올라온 안건에 찬성표를 던지는 정도가 고작이다. 대외적으로는 '인맥'을 앞세워 소속 기업의 대외창구나 호위병 역할에 주력한다.

국내 대기업 사외이사 애기다. 사외이사 제도는 대주주의 독단과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도입됐다. 당시 상당수 대기업 오너들이 무리한 투자를 하다 회사를 통째로 날린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도입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외이사 제도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본연의 임무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모양새다. 실제, 대기업 사외이사 대부분은 거수기로 전락하거나 '로비용' 내지는 '방패막이용'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많은 사회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마 위에 오른 사외이사 제도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권력기관 출신' 대외창구용

사외이사는 오너와 관련 없는 외부인사를 이사회에 참가시켜 대주주의 독단경영과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는 제도다. 국내에서는 1998년 사외이사를 처음 도입, 의무화하고 있다. 사외이사 선출 방식은 제도화돼 있다. 자산규모 2조원 이상 기업은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서 후보를 추천하도록 돼 있다.

초창기만 해도 주로 학계, 시민단체 등의 인사가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사외이사진을 교수나 정ㆍ관계 고위급 인사들로 구성하는 게 관행이 돼 버렸다. 주로 거수기 내지는 로비, 보험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런 현상은 최근 공개된 대기업 공시 자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삼성 롯데 한화 두산 등 10대 그룹 소속 93개 상장계열사의 사외이사는 6월 말 현재 모두 330명이며 이 중 77명이 새로 뽑혔다.

신임 사외이사 가운데 인기 있는 직군은 공직을 지낸 '힘 있는 사외이사'다. 실제, 기업들은 검찰(10명), 행정부 공무원(9명), 국세청(4명), 공정거래위(3명), 판사(2명), 관세청(1명) 등 고위 관료나 권력기관 출신 29명을 새로 선임했다.

차관급에서 신규 선임된 인물은 김정관 전 지식경제부 2차관(삼성생명), 문효남 전 서울고검장(삼성화재), 노민기 전 노동부 차관(삼성SDIㆍ롯데미도파), 서대원 전 국정원 1차장(두산), 이재훈 전 지식경제부 2차관(두산인프라코어), 김태현 전 법무연수원장(롯데쇼핑), 조근호 전 법무연수원장(롯데손해보험), 문성우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대한생명), 이동명 전 의정부지법원장(한진해운) 등이다.

검사장급 이하 검찰 출신은 신종대 전 대구지검장(롯데칠성), 이승섭 전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SK증권), 양재택 전 서울남부지검 차장(코원에너지서비스), 이석수 전 전주지검 차장(대한생명), 윤세리 법무법인 율촌 대표변호사(두산인프라코어ㆍSK하이닉스) 등이었다.

기획재정부 관련 인사는 민상기 전 재경부 금융발전심의회 위원장(롯데쇼핑), 정병태 전 재경부 국장(호텔신라), 진병화 전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GS건설) 등 3명이었다.

국세청에서는 이주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대한항공), 김남문 전 대전지방국세청장(롯데칠성), 김창섭 전 국세공무원교육원장(두산건설), 석호영 전 서울지방국세청 국장(현대글로비스) 등이 이름을 올렸다.

공정거래위원회 출신은 주순식 전 상임위원(현대중공업ㆍSK C&C)과 이동훈 전 공정위 사무처장(현대글로비스)이 있었다. 손병조 전 관세청 차장은 삼성화재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여기에 기존 인사들 91명을 더하면 10대 그룹의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는 모두 120명에 달한다. 이는 전체의 36.4%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처럼 기업들이 정ㆍ관계 인사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재계에선 '보험용' 내지는 '로비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재계에선 "정ㆍ관계 고위급 인사를 얼마나 영입했느냐가 해당 회사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이에 대해 대기업들은 "업무 이해도가 높아야 하기 때문에 정ㆍ관계에서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은 인물들이 필요하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관계자는 "현재 경영감시라는 취지로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대기업들은 이사회가 갖는 무게감을 외부에 과시하고 규제 이슈에 대한 로비 통로 확보를 목적으로 권력기관 출신을 사외이사로 임명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본연 임무 뒷전 '거수기'로

지난해 벌어진 저축은행 사태는 사외이사 제도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저축은행들의 청와대, 검찰, 법원, 국정원, 국세청 출신 사외이사들은 수천만원대의 보수를 챙기면서 대주주의 불법과 비리에 아무런 견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영 감시는커녕 오히려 오너의 독주에 힘을 실어줬다. 실제, 일부 사외이사가 과거 자신의 직장 선후배에게 로비나 벌이는 한심한 행태가 검찰 수사에서 낱낱이 밝혀졌다.

사외이사들이 이처럼 '용도 외 업무'에 골몰하는 동안 본연의 업무는 사실상 뒷전으로 밀렸다. 사외이사들이 기업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모습은 공정위가 지난해 11월 공개한 '대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시가총액 상위 100개사 가운데 대기업집단 소속 79개사의 지난해 이사회운영 결과, 상정 안건 2,020건 중 사외이사의 반대로 부결된 안건은 고작 1건에 불과했다.

사외이사들의 '무책임한 손들기'의 가장 큰 피해자는 소액주주다. 안건 중에 임원 특별상여금 지급, 계열사 유상증자 참여, 회사채 발행한도 승인 등 소액주주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사안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선임구조 문제… 해결책은?

그렇다면 사외이사들은 이처럼 제구실을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사외이사 선임구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외이사는 사외이사 후보 추천위원회의 추천을 거쳐 주주총회가 선임하게 돼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오너, 대주주, 최고경영자, 기존 이사가 사실상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 회사의 권익을 위해 힘 써줄, 오너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을 선임되는 게 당연지사다. 반대로 경영진 의견에 반대할 만한 인사는 애초 이름조차 올리기 어렵다.

당연히 사외이사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구조다. 특히 사외이사에 선임된 이들이 대부분이 정년퇴직이 가까워졌거나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인사라는 점도 사외이사들이 경영 감시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유다.

물론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선 사외이사 제도만 제대로 운영돼도 경제민주화나 재벌개혁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라는 견해마저 내놓을 정도다.

문제는 제도 운영에 있다. 이런 폐단을 없애려면 무엇보다 지배주주가 전권을 휘두르는 사외이사 선임 구도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주주 입김을 최대한 배제하고 공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들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한 재계 관계자는 "사외이사는 대주주로부터 독립적인 인사가 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이를 위해 별도의 추천기구를 만들어 객관적인 입장에서 회사의 경영상태를 감독하고 조언하는 인사를 뽑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서는 사외이사에게도 경영실패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관계자는 "사법부가 법을 적극 해석해 사외이사들도 법적 책임에 부담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당 1,000만원짜리 '신의 부업' 사외이사


1년 이사회 열흘 참석하고 연봉 최대1억원 챙겨

송응철기자


지배주주의 독단경영과 전횡의 견제 등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사외이사들이 수준급의 연봉을 받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의 연봉은 최대 1억원 정도에 달했다. 1년에 약 열흘만 이사회에 참석하면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당이 1,000만원 수준인 셈이다. 그야 말로 '신이 내린 부업'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포스코는 지난해 5명의 사외이사에게 평균 9,900만원의 보수를 지급, '연봉킹'에 올랐다. 그리고 현대제철이 9,000만원으로 2위를 차지했고, SK텔레콤이 8,900만원으로 3위에 랭크됐다.

그 뒤를 이어 현대차(8,600만원), 기아차(8,300만원), LG전자(7,800만원), LG(7,800만원), 현대모비스(7,700만원), 현대글로비스(7,500만원), KT&G(7,200만원), 현대건설(6,900만원), SK(6,900만원), SK이노베이션(6,900만원), S-Oil(6,680만원), LG화학(6,600만원), 삼성물산(6,600만원), 삼성전자(6,000만원) 순으로 연봉이 많았다.

사외이사들의 연봉이 공개되자 하는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평소 회사 현안을 고민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해당 회사들의 해명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연봉수준이라는 게 대체적인 정서다.

이와 관련 한 재계관계자는 "사외이사들이 이사회, 감사위 회의 등에 참석해 활동한 내역을 들여다보면 임무를 제대로 해냈다고 보기 어렵다"며 "그럼에도 거액의 연봉을 제공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