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8월16일 오전 굳은 표정으로 선고공판이 열리는 서울 서부지법 로비로 들어서고 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법정 구속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최재원 수석부회장 형제의 1심 선고를 앞두고 기업들이 '배임죄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김 회장이 이미 배임죄로 법정 구속된 데다, 최 회장 형제마저 배임 혐의를 받고 있어, 기업으로서는 자칫하면 '정상적인 경영활동도 법률자문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다는 하소연이다.

기업인에게 적용되는 배임죄는 본인 또는 제3자에게 이득을 주기 위해 회사에 손실을 끼치는 의사결정을 한 경우다. 김 회장은 이 혐의가 적용돼 지난 8월16일 법정 구속됐지만, 한화 측은 배임 행위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 이렇다. 한화그룹 측에 따르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유동성 위기에 빠진 그룹은 주력사 및 비주력사 매각과 보유 부동산 처분, 합병 등 구조조정에 매진했다.

김 회장 등 경영진들이 배임혐의로 처벌을 받은 한유통과 웰롭도 사실상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한유통과 웰롭을 위장계열사로 보고, 김 회장이 부당지원을 하는 바람에 주주들에게 수천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며 기소했다는 것이다.

최태원 SK 회장
이와 관련, 한화의 한 임원은 "김대중 정부가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시키면서 한유통과 웰롭은 그룹계열사들의 출자한도 소진으로 불가피하게 그룹밖에 있었지만, 모든 것을 그룹에서 관리해온 계열사였다"며 "마케팅 활동도 한화 이름으로 이뤄졌고, 심지어 주거래은행에서도 한화계열사로 간주해서 자금지원을 했는데, 위장 계열사라니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두 회사가 외환위기 이후 경영악화로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부터. 한화그룹 측은 한유통이 쓰러진다면 한유통에 지급보증 등을 한 그룹 계열사들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고, 또 사실상 계열사였으니 그룹 차원의 지원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두 회사에 대해 지급보증을 연장해 주고, 2,800억원대의 보유 부동산도 매입해준 것은 그룹 전체를 살리기 위한 '구조 조정'차원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해서 두 회사는 보란 듯이 살아났다.

그럼에도 검찰은 8년이 지난 후 위장 계열사에 부당지원을 해 주주들에게 수천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며 김회장을 배임혐의로 기소하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처럼 '성공한 구조조정'에 대해 수년이 지난 뒤 그룹 총수에게 배임죄를 묻는 게 타당한가 여부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삼성도 예외가 아닐 만큼 초고금리 속 돈 가뭄과 판매부진 등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소위 4대 그룹의 회사채 금리가 무려 30%대에 이르렀다. 일부 그룹은 계열사를 팔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도자료로 언론에 배포하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당시 30대 재벌 중 대우, 쌍용, 진로, 기아차, 동아건설 등 16개 그룹이 쓰러졌었다.

당시 대기업 구조조정 상황을 지켜봤던 한 전문가는 "외환위기 당시에는 기업구조조정상의 '이헌재 룰'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헌재 룰'은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을 총괄 지휘했던 이헌재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이 제시한 구조조정의 대원칙을 말한다.

대기업 계열사의 부실처리 및 매각, 인수합병 등은 대주주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헌재 룰'은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공적 자금 투입을 최소화하려는 포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대주주의 책임경영을 앞세워 재벌 총수의 사재 출연까지 염두에 둔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유통이 부도나고 한화 전체가 휘청거리는 위기란, 당시로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최악의 시나리오로 여겨진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변칙상속 같은 배임행위는 당연히 엄히 다스려야겠지만 위기 상황에서 기업을 살리기 위한 정상적인 경영 판단까지 배임으로 몰고 간다면 리스크가 따르는 의사결정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이번 기회에 명확한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프랑스 대법원은 1985년 기업인 배임죄에 관한 로젠블룸 (Rozenblum) 판결을 내렸다. 그룹계열사들이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내부거래나 출자 등을 할 경우 경영진에게 배임죄를 물을 수 없다는 점을 명문화한 것.

이 판결이 그룹 경영에서 계열사간 거래 등에 대해 최고경영자의 폭넓은 자율 행위를 인정하는 바람에 프랑스 최고경영자들은 배임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소신껏 경영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한국에선 배임 여부가 검찰이나 판사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다. 최근 한국전력이 전력구매비용에 손실을 입혔다는 이유로 전력거래소 등을 상대로 4조원대 손해배상소송 계획을 밝혔던 것도 자의적 잣대의 '배임 죄'공포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 방침을 따르다 보면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 인해 공기업 경영자가 추후 소액주주로부터 배임 추궁을 당한다면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룹오너나 고위 경영인들은 앞으로 '배임'이라는 짐을 지고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으로 경영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