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 신화 이끈 국내 최초 주식회사'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 출발… 수출기업 성장 1호 상장사 영예유통 복합쇼핑몰 등 사업 다각화창립자 친일 행적 논란이 '흠' '포스트 김각중' 후계자 시선집중

사람들은 만으로 예순살이 되는 해에 환갑잔치를 치른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요즘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됐지만 여전히 인생의 한 주기를 잘 마친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환갑잔치를 벌이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한다.

기업들의 평균수명은 사람들보다도 짧다. 30년 이상 무사히 생존하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특히 자본주의 도입이 늦은 데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무사히 환갑잔치를 하는 기업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1953년 이전에 창립, 지금까지도 위세가 당당한 기업들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환갑을 넘긴 진정한 '장수기업'들은 어떻게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며 지금까지 왔을까? 도전과 혁신(두산), 효자상품(동화약품), 안정적 재무구조(한국도자기), 끊임없는 연구개발(한국타이어), 윤리경영(유한양행) 등 장수비결은 제각각이지만 저마다 자신만의 '기업철학'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최초의 주식회사ㆍ1호 상장사 영예

경방의 전신은 경성방직주식회사(이하 경성방직)이다. 일제시대 대표적 기업가로 꼽히는 인촌 김성수 선생은 국내 최초의 면방기업인 경성직뉴주식회사를 1915년 인수ㆍ경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3.1운동 직후 김성수 선생이 전국을 돌며 각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1인 1주 공모방식으로 자본금을 마련해 세운 경성방직은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로 기록됐다.

영등포 경방 타임스퀘어
경성방직의 초대사장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씨가 맡았다. 그러나 경성방직은 설립 초기부터 자본금의 절반을 날리는 등 위기에 빠지게 됐고 이를 구하기 위해 1935년 김성수 선생의 동생인 김연수 사장이 취임했다.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고 민족정서에 호소하는 마케팅을 하는 등 김연수 사장의 사업수완 덕에 이 시기 경성방직은 국내 기업 최초로 만주에 진출하는 등 성장가도를 달렸다.

현재 경성방직의 기초를 다져 사실상 창업주로 불리는 인물은 김용환 회장이다. 1938년 경성방직에 지배인으로 들어온 김용환 회장은 1946년 제4대 사장에 올랐다. 해방 직후 면방직산업이 번창한 것과 발맞춰 경성방직은 대표적 섬유수출 기업으로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성방직은 국내 1호 상장사라는 영예도 안고 있다. 대한증권거래소가 1956년 발족하며 시작된 국내 주식시장의 가장 큰 형님인 셈이다. 조흥은행, 한국상업은행, 대한해운공사, 조선운수 등 증시 개장 당시 상장된 12개 종목 중 경성방직은 회원번호 001번을 받았다.

경성방직은 1970년 경방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새롭게 태어난 경방을 이끈 주인공은 김용환 회장의 아들로 1975년 대표이사로 취임한 김각중 회장이었다. 1987년 수출 1억달러 돌파라는 신기원을 달성한 김각중 회장은 1990년 경방어패럴을, 1992년 경방유통을, 1994년 경방필백화점을 세우는 등 사업을 다각화하며 경방그룹으로 성장시켰다. 2009년에는 서울 영등포 옛 경성방직 자리에 초대형 복합쇼핑몰 타임스퀘어를 개장하며 경방의 새로운 전성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2010년 김각중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아들인 김준, 김담 대표가 경영을 이어받아 경방을 이끌고 있다.

김준 경방 사장
창립자 '친일 의혹' 흠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라는 창립이념을 바탕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은 영등포공장 정문에 '우리 공장은 조선인만 채용합니다'라고 써서 붙이는 등 민족기업으로서의 기치를 내걸고 사업을 해왔다. 이 같은 정신을 바탕으로 해방 이후 경성방직은 '경성방직 제품 사용은 곧 나라사랑'이라는 애국 마케팅 전략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표적인 민족기업으로 시작됐다는 경방의 정체성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창립자격인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김성수 선생은 1937년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을 헌납하고 이듬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를 맡았다.

김연수 사장 역시 1939년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를 역임하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는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척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경력도 지니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김연수 사장의 후손들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최소 소송에서 패소하며 체면을 구긴 바 있다.

김담 경방 부사장
포스트 김각중 누구?

경방은 현재 고 김각중 명예회장의 장ㆍ차남인 김준 사장과 김담 부사장이 고모부인 이중홍 회장과 함께 경영을 맡고 있다. 이중 김준 사장은 면방직사업과 투자부문 계열사를 운영하고 있고, 김준 부사장은 경방타임스퀘어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지난해 고 김각중 명예회장이 별세하면서 재계의 시선은 경방의 후계구도가 어떻게 정립될 것인지에 쏠렸다. 보통 장남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깃이 일반적이지만 경방의 경우 그 상황이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경방의 보유지분을 따져보면 동생인 김담 부사장이 20.98%의 주식을 소유, 13.44%에 불과한 김준 사장보다 월등히 앞선다. 김담 부사장은 김각중 명예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직후인 2010년 4월, 장외거래를 통해 20만3,847주를 인수하며 김준 사장을 제치고 경방의 최대주주에 올랐다. 두 사람을 포함해 친인척, 경방육영회, 계열사, 관계사 등이 보유한 경방의 지분이 총 56.63%인 점을 감안하면 김담 부사장의 지분 장악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맡고 있는 사업의 성적 또한 동생이 앞서고 있다. 김준 사장이 맡고 있는 면방직사업 등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반면 김담 부사장이 이끄는 타임스퀘어는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다. 백화점, 마트, 호텔, 영화관, 대형 서점, 오피스 빌딩, 쇼핑매장 등이 어우러진 도심형 복합쇼핑몰인 타임스퀘어는 지난해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장소로 선정되는 등 여러 면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경방이 형제 간의 경영권 분쟁 불씨와 대내외 사업환경 악화를 딛고 100년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는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