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火' 다독여야 큰 범죄 막는다분노의 첫 번째 배출구는 가족과 본인… 충동행동 반복 땐 인간관계 무너져증세 심하면 살인 등 묻지 마 범죄도… 청소년 정신건강 상담 점증세성인은 습관성… 정신과도 치료 힘들어… 이상신호 땐 즉시 분노조절 교육을

전문가들은 어렸을때화를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면 커서도 분노조절장애로 고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혜영 기자
"개 같은 X아." A씨는 틈만 나면 입에 못 담을 욕설을 퍼부으며 아내와 아들을 때린다. 그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의 간부다. 맡은 일은 해내고야 마는 추진력, 할 말과 안 할 말을 분별할 줄 아는 진중한 성격, 부하직원들을 칼처럼 대하는 관리능력을 인정받아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집에서는 아들이 말대답만 해도 쌍욕과 주먹부터 날리는 한 마리 성난 짐승일 뿐이다.

고등학생인 B군은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최근 큰 사고를 쳤다. 아버지로부터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는 핀잔을 들은 날 마음속에 응어리진 뭔가가 폭발했다. 그는 아버지 지갑에서 카드를 훔쳐 개당 30만원 안팎의 피규어 60개를 샀다. 아버지 카드로 긁은 돈은 무려 2,000여만원. B군은 아버지가 주먹을 휘두르거나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아버지 지갑에 저절로 손이 간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A씨와 B군은 분노조절장애 증상으로 인해 전문가 도움을 받았다. 특이한 건 둘 다 스스로 전문가를 찾지 않았다는 점이다. A씨는 우울증 상담을 받던 아내의 손에 이끌려 상담소에 들렀다. B군은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어머니가 상담을 요청했다. A씨와 B군의 사례를 보면 분노조절장애가 개인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이들은 주변인을 힘들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차희연 한국감정조절코칭협회 소장은 "화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부분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면서 "욱하는 감정을 못 참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뒷말을 늘어놓거나 대놓고 막말을 퍼붓는 등의 충동적인 행동은 결국 주변 사람과의 갈등을 낳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차 소장은 "저마다 화나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분노는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가장 얻기 어려운 감정"이라며 "자신이 분노하는 지점을 인지하고 감정 조절에 힘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나영 이룸심리상담연구소 소장도 "분노조절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인을 힘들게 한다"고 했다. 이 소장은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람도 분노를 안으로 삭이는 사람도 결국 '감정의 하수구'를 찾는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의 경우 직장에서 쌓인 분노를 가정에서 터뜨리는 경우가 많고 분노를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성향인 여성은 우울증 등으로 치닫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 소장은 분노조절장애가 심해지면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의 말마따나 개인의 분노조절장애가 극단적인 사회범죄로 이어지는 사례는 흔하다. 지난 9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백악관과 의회 의사당 코앞에서 범인을 포함해 1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범인은 분노조절장애가 있던 30대 남성이었다. 한국에서도 10대가 홧김에 잔소리하는 부모를 흉기로 찔러 죽이거나 60대 남편이 잔소리하는 아내를 살해해 시신을 토막 낸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는 행인을 홧김에 죽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지난 5월 두 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십정동 방화사건도 70대 집주인이 홧김에 저질렀다.

경찰청과 형사정책연구원이 공동으로 분석한 2011년 범죄통계에 따르면 살인, 폭력 등 강력범죄 상당수가 우발적으로 벌어진다. 우발적 범행은 순간 욱하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분노조절장애가 우발적 범행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는 셈이다. 신경민 민주당 의원의 분석도 경찰청 자료와 일치한다. 신 의원이 2012년부터 2013년 8월까지 발생한 '묻지 마 범죄' 87건을 분석한 결과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18건이었다.

박지선 경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지난해 일어난 '여의도 칼부림 사건'과 '의정부역 흉기난동 사건'처럼 자아통제력이 약한 사람들이 순간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을 화나게 한 직접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의 발언은 감정조절장애 문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다뤄야 할 필요성을 입증한다.

박 교수는 "한 자녀 가정이 많아진 현대사회는 아이들의 요구를 무작정 들어주기만 할 뿐 통제하지 않는다. 가정에서 분노를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셈"이라며 "가정과 학교에서 공동체교육을 하지 않고 범죄 기회를 줄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분노조절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우발적 범죄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분노조절장애 문제의 해법을 가정교육에서 찾는 박 교수의 해법은 일면 상투적으로 보이지만 타당하다. 성인의 경우 분노가 습관이 된 탓에 정신과에서도 치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이 9~24세 청소년 3,500명을 대면상담한 결과를 담은 '2012년 상담경향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정신건강 상담이 25.5%(882건)로 가장 많다. 정신건강 영역 중 우울ㆍ위축감에 따른 상담은 2008년 4.3%(279건), 2009년 4.8%(179건), 2010년 6.8%(203건), 2011년 8.8%(261건), 2012년 12.6%(442건)으로 5년째 비중이 늘었다. 자살ㆍ자해 시도에 따른 상담도 2008년 0.5%(36건), 2009년 0.7%(27건), 2010년 2.8%(84건), 2011년 1.0%(30건), 2012년 3.1%(108건)로 대체로 증가했다. 이처럼 정신건강 상담이 느는 건 청소년 정신건강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신호다. 가정과 학교 등에서 이 신호를 무시하면 정신건강 문제로 고민하는 청소년은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돼 언제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조옥희 기자 hermes@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