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닷새 만에 12만 명 기록…국방부는 회의적 태도

[주간한국 주현웅 기자] 여성 징병제가 또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청와대 국민청원의 한 게시글이 도화선이 됐다. 대선 출마에 도전하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성도 기초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는 것을 제안하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여성징병제 논란은 이전과 달리 소모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시각이 크다. 논란의 기저에 남녀갈등 문제가 깔렸다는 분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국가적 안보 등을 바탕에 둔 대안 제시라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반감이 배경이라는 뜻이다. 논의의 전개 양상이 합리적이고 건전하기보다 갈등과 대립으로 향해갈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여성징병제가 돌연 화두로 떠올랐다.
박용진 “여성도 기초훈련 받아야” 책 발간
여성 징병제 논란의 발단은 지난 1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 때문이다. 한 청원인은 <여성도 징병대상에 포함시켜 주십시오>라는 게시물에서 “여성 또한 징집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며 “성평등을 추구하고 여성의 능력이 결코 남성에 비해 떨어지지 않음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청원에 여성 징병제가 올라온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에도 같은 청원이 있었다. 당시 글은 한 달 동안 12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당시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해당 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재미있는 이슈 같다”며 “요즘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자들이 거의 해마다 여성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볍게 넘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의 여성 징병제 청원 글은 앞선 동의 인원인 12만 명을 불과 닷새 만에 넘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청와대가 공식 대답을 내놓는 기준인 20만 명을 넘기는 것도 시간문제다. 해당 청원 댓글에서 한 시민은 “재미있는 이슈라고 생각하지 말고 제발 관심 있게 봐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여성 징병제 국민청원이 주목을 끈 배경에는 정치권의 관심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박용진 의원은 여성 징병제 국민청원이 올라온 이날 저서 ‘박용진의 정치혁명’을 발간했다. 박 의원은 책에서 ‘남녀평등복무제’ 도입을 거론하면서 “남녀 모두 40~100일간 기초군사훈련을 실시해야 한다”며 “이로써 병역가산점 등 불필요한 남녀 차별 논란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같은 날 언론 인터뷰에서도 이 같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남녀평등복무제가 남녀갈등을 부추긴다’는 질문에 “논란이 무서워서 필요한 제안을 안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미 대한민국 군대의 전투병과, 전방부대의 여성 군인이 간부와 지휘관을 맡고 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고 부연했다.
여성 징병제를 남성들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계 안에서도 이전부터 같은 논의가 이뤄졌다.
여성운동가 출신인 권인숙 민주당 의원은 2008년 여성징병제의 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스라엘과 스웨덴 등 여성 징병제를 도입한 국가들의 사례를 들 여성의 병역의무 이행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였던 그는 ‘징병제의 여성참여’ 논문에서 “이스라엘과 스웨덴 등의 사례로 봤을 때 징병제를 통해서든 아니든 군에서의 여성 수 증가와 역할 확대는 당연한 경향성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정책의 방향으로 인정되고 있다”며 “여성 징병제든, 징병제의 여성참여든 여성이 징병제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박 의원과 권 의원 말처럼 여성 징병제 관련 논의의 본질은 성 평등과 더불어 안보 등 사회적 가치에 있다. 특히 권 의원은 논문에서 “이스라엘과 스웨덴의 여성 징병제 당위성은 군의 양성 평등 이념 도입, 성폭력 문제 해결 등 군의 변화 필요성, 여성이 군에서의 직업적 장래를 확보하려는 의지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며 군대 문화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바라봤다.
지난달 9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국회에서 비공개로 열린 당무위원회를 마치고 나올 당시 모습.(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등 정치권 ‘모병제’ 전환 주장 이어져
하지만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등이 불붙인 여성 징병제 논의는 성대결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로 해당 청원글이 급속도로 동의 인원을 늘린 데에는 남성들이 주로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뤄진 ‘화력지원’ 영향이 적지 않다. ‘안티페미니즘’ 등을 기치로 한 일부 커뮤니티에서 실시간 현황을 전달하며 동의를 재촉했던 것이다.
한 누리꾼은 “아직도 중장년 노년층 남자들은 ‘여자들은 나약하니까 양보해도 된다’는 사고를 갖고 있다”며 “한국의 페미니즘은 이를 이용해 계속 본인들만을 위한 정책을 해오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군대에서 2년 동안 인생 허비하며 희생하고 있다는 (사회적) 존중만 있었어도, 이렇게 여성 징병 운운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다 보니 지금의 논의는 본질을 빗겨간 채 성 대결만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차기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덩달아 편승할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20대 남성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여성의 병역 논란을 소위 ‘젠더’(Gender·성) 이슈로만 활용하면 사회적 분열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은 지난 18일 페이스북에서 ‘여성 징병제’를 거론하며 “대선 전까지 젠더 이슈 관련 쟁점들이 논의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누구의 표를 어떻게 가져올지의 얄팍한 표계산은 다 드러날 것”이라며 “계급갈등 혹은 남성들의 세대 내 갈등을 젠더 갈등으로 풀고자 하면, 여자들이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모병제 도입을 논의해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박 의원과 권 의원도 병역에 관한 최적의 대안은 모병제라고 밝혔다. 박 의원은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100대 그룹 초봉 대우를 갖춘 모병제로 엘리트 정예 강군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권 의원도 지난 19일 MBC 라디오 ‘표창원의 뉴스하이킥’에 출연해 “여성들의 의지, 모병제 준비 상태, 국제 정세 등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면서 “모병제에 관한 논의가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논란에 가세했다. 그가 들고 나온 카드는 ‘선택적 모병제’이다. 이 지사는 지난 21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현재의 여성징병제 논의는)쓸모 없는 얘기로 젠더 갈등을 촉발하는 것”이라며 “남성의 불만을 이유로 (군 복무에서)여성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갈등만 격화시키는 대증요법”이라고 말했다.
이 지사는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징병을 하되 원하는 사람은 모병제처럼 장기 복무의 기회와 함께 충분한 보수를 줘야 한다”며 “이렇게 되면 모병과 징병 모두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청년 실업 문제도 완화할 수 있고 국방력도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방부는 여성 징병제 등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일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부승찬 대변인은 관련 질문에 “(여성 징병제는)거쳐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면서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