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의 천사어렵고 더러운 일로 여긴 간호를 숭고한 일로

[역사 속 여성이야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가난한 사람들의 천사
어렵고 더러운 일로 여긴 간호를 숭고한 일로


돈의 논리로 세상이 재단되어 갈수록 그 논리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몰락해간다. 아무리 사회가 진보하고 문명이 발달하여도 그것이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상대적 빈곤감만 안겨 줄뿐이라면 그것을 과연 진보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지나 봉사라는 말이 있다. 같은 공간과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함께 법적으로 혜택을 나누는 것이 복지이고 거기에 개인의 마음이 더해지면 그것은 봉사가 된다.

인류가 오랜 농경 생활을 접고 막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던 19세기에는 사람들에게 복지나 봉사같은 개념은 거의 전무하였다. 힘과 돈을 가진 사람만이 혜택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사람의 생과 사를 가름하는 의료와 간호부분에서 그런 현상은 더하였다. 중심에서 밀려난 대다수의 사람들은 병과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중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자신의 안락한 삶을 접어두고 복지와 봉사가 무엇인가를 간호로 보여준 여인이었다. 그녀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상류 계층의 딸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는 영국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나라였다. 극단적인 부와 극단적인 가난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불릴 만큼 지구 곳곳에 식민지를 경영, 나날이 부유해지던 국가와 상류층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 부유한 국가와 상류층의 삶을 떠받치기 위해 한없이 착취당하기만 하는 노동자, 농민층과 식민지의 사람들이 있었다. 화려하고 격식화되어가던 영국상류층의 삶과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확연히 구별되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 ~ 1910)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는 영국의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해외여행 중 이탈리아의 플로렌스(피렌체)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둘째딸로 얻었다. 그녀의 이름은 태어난 곳의 지명을 따서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이팅게일의 가족은 사시사철 기후에 따라 거처하는 집이 각 지방마다 있을 만큼 부유했다. 그녀의 집을 오가는 사람이나 부모가 교유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대 유명인이나 상류층들이었다. 나이팅게일의 인생도 부모를 따라 그대로 상류층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갈 듯이 보였다.

그러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조금 다른 아이였다. 그녀는 상류층의 생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거리에 넘쳐나는 궁핍한 사람들의 모습과 자기 집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삶 속에서 괴리를 느끼고 괴로워했다. 그녀는 주어진 안락한 삶 속에 안착할 사람이 아니었다.

간호사가 되다

나이팅게일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녀가 고민 끝에 찾아 낸 것은 ‘간호’였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거의 막혀 있던 시기에 여성의 몸으로 직접 할 수 있는 봉사활동으로는 ‘간호’가 최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간호라는 것이 19세기 상황에서는 미천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환자를 간호하는 일이 숭고한 일로 여겨지기보다는 어렵고 더러운 일로 여겨져 하층 계급의 여인이 아니면 아무도 간호사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상류층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나이팅게일이 간호를 인생의 길로 정하고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이 좋은 가문의 남자들이 나이팅게일에게 청혼을 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나이팅게일은 더 이상 가식적인 상류층의 삶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17세부터 시작한 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31살 나結?나이팅게일은 겨우 간호사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이팅게일은 1851년 독일 카이젤스베르트에 있는 간호원 양성소를 찾아가서 3개월 간 교육을 받는다. 그 후 독일과 프랑스의 병원을 직접 돌아보며 간호법과 병원 관리법을 배운다. 런던으로 돌아온 후 나이팅게일은 할레병원 간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 즈음 런던에 콜레라가 창궐한다. 나이팅게일은 병이 전염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진해서 가난한 콜레라 환자를 간호한다. 그녀의 간호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상류층 여인의 치기어린 시도라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사람들도 점점 나이팅게일의 진심에 감동받기 시작하였다.

크림전쟁

1853년 크림반도에서 일어난 영국과 러시아간의 전쟁은 플로렌스에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이어 새로운 인도주의에 눈을 뜨게 한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의 참상에 관한 보도에 자극되어 국민모금을 통해 기금을 모은 뒤, 38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크림반도로 가 야전병원에서 활약하였다. 그 곳에는 전쟁 중에, 그것도 사람이 다치고 죽어가는 병원에서도 신분이 생과 사를 가름하고 있었다. 몇 안되는 장교 이상의 사람들 위주로 의료와 간호가 이루어져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었던 일반 병사들은 죽음 앞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의 이런 상황을 대폭 개혁하였다. 그녀가 크림 전쟁 야전병원에 도착한 뒤 불과 몇 개월 내에 사망률은 크게 감소하였다. 단 5개월 동안 나이팅게일은 사망률을 42%에서 2%로 줄였다. 생명을 위한 초인적인 노력은 전 군인들을 감동시켜 나이팅게일은 ‘크림의 천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간호학교를 세우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나이팅게일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병원개혁안을 건의한다. 더불어 크림전쟁에서의 공로로 받은 상금을 털어 런던의 성 토마스 병원 내에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를 창설한다. 그녀로 인해 사람들은 간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더 이상 간호를 미천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간호의 일이 봉사정신이 바탕이 된 숭고한 일로 높이 평가되었고, 많은 여성들이 간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전까지 교회나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간호교육을 정식 학교에서 하게 만들어 종교로부터 간호가 독립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 제도는 영국으로부터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현대의 간호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나이팅게일은 이후 일선에서 직접 간호사로서 일하지는 못했다. 크림전쟁에서 얻은 병이 그녀의 나머지 50년 인생을 계속 괴롭혔다. 현장에서 물러난 나이팅게일은 이후의 여생을 그녀의 봉사활동에 자극받아 영국과 유럽 각국에서 막 시작한 의료 구호제도에 대해 자문하는 것으로 보냈다. 더불어 각종 저작과 서한 등을 통해 간호의 체계를 잡고 이론을 만들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1-09 19:43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