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낳은 '녹색의 마주'졸음과 광기, 자살을 유발하는 허브에서 추출한 독주

[문화 속 음식기행] 인상파 화가 드가의 <압상트>
명작을 낳은 '녹색의 마주'
졸음과 광기, 자살을 유발하는 허브에서 추출한 독주


요즘 들어 연예인과 대마초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프랑소와즈 사강이 이야기했던 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명제에는 대답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수많은 예술가들이 술과 마약 등 자신의 육체를 갉아먹는 것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를 파괴하고서 남긴 걸작, 그것은 어쩌면 악마와 거래한 대가이기에 더욱 매혹적인지도 모르겠다.

세기말의 음울함이 전 유럽을 휩쓸던 시절의 파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천국이었다. 파리의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툴르즈 로트렉이나 아르튀르 랭보 같은 화가, 문인들은 ‘녹색의 마주(魔酒)’라고 불리던 압상트에 취한 채 인생과 예술을 논했다.

젊은 시절 파리를 찾은 헤밍웨이와 불운한 천재 고흐 역시 압상트를 즐겨 마셨으며 더러는 작품 속의 소재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졸음과 광기, 자살을 유발하는 일종의 환각제였던 압상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상파 미술과 자연주의ㆍ상징주의 문학의 명작을 낳은 원천이 된다.

드가의 그림 <압상트>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어스름이 깔릴 무렵, 한 여인과 한 남자가 압상트 한 병과 잔 하나를 놓고는 카페에 나란히 앉아 있다. 최신 유행의 옷차림과 대조적으로 여자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어둡고, 남자는 냉담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압상트 잔과 테이블의 흐릿한 초록색처럼 이들의 시선도 취한 듯 초점이 없다. 두 사람의 등 뒤에 드리워진 새까만 그림자만이 돋보여 쓸쓸한 분위기를 돋운다. 두 사람이 연인인지, 아니면 우연히 만난 사이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은 함께 앉아 있는데도 외롭고 불안해 보인다. 마치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만남에 지친 현대인들처럼.

- 권태와 우울을 녹여낸 한잔의 압상트

에드가르 드가는 1876년, 친구인 화가 마르셀렝 데부텡과 여배우 엘렌 앙드레를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의 인물화와 달리 모델들이 오른쪽에 치우쳐 있고, 심지어 몸 일부가 잘려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모델을 하나의 ‘정물’로 취급함으로써 고립감과 거리감을 더욱 강조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드가의 이런 차가운 시선은 우수 어린 세기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오늘날의 포스트 모더니즘 예술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 자신이 고독한 도시인이었던 드가는 일생 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권태와 우울함을 한 잔의 압상트 속에 녹여낸 셈이다.

에메랄드처럼 황홀한 초록색을 띈 압상트는 분류상 리큐르(혼성주)에 속한다. 리큐르는 그 탄생 과정부터가 재미있는 술이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금을 합성하는 방법을 연구할 뿐 아니라 각종 의약품과 주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들은 증류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약초나 허브를 첨가해 영약으로 취급했다.

이탈리아에서 발달해 온 리큐르는 카트린느 메디치 왕비에 의해 프랑스에 전해져 그 종류가 더욱 다양해진다. 일종의 건강 식품이었던 리큐르의 역할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8세기경으로, 이때부터는 유럽인들의 식생활이 풍성해지면서 각종 과일향을 지닌 리큐르를 식후에 즐겨 마시게 되었다.

또한 파티 석상의 귀부인들은 옷 색깔에 맞는 리큐르를 마시는 유행을 만들기도 했다. 오늘날 리큐르의 재료는 커피, 카카오, 바닐라 등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으며 우리나라 가정에서 담그는 과실주도 엄밀히 말하면 리큐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 환각성분 포함, 처음엔 해열제로 사용

압상트는 1730년 ‘피에르 오르디넬’라는 의사가 쑥과 아니스, 펜넬, 코리앤더 등의 허브를 추출해서 만들었다. 특이한 향기에 연한 쓴맛을 지닌 ‘비터 리큐르’에 해당하며 도수가 68도에 이르는 독주이다. 그래서 보통은 물과 설탕을 섞어 마셨다고 하는데 물을 섞으면 우유처럼 뿌옇게 변한다. 이런 특징은 페르노나 리카, 혹은 그리스의 전통주인 우조 등 아니스를 포함한 다른 술에서도 나타난다.

허브가 들어간 대부분의 리큐르가 그렇듯, 이 술의 용도도 처음에는 약용이었으며 프랑스, 벨기에 등지【?해열제로 사용되었다. 압상트 재료로 사용되는 ‘웜우드(wormwood)'라는 식물에는 약한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성분은 장기 복용하면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 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20세기 초반에 들어 미국과 프랑스 등은 압상트의 반입과 생산을 금지했고, 현재 체코 공화국만이 유일하게 생산해 내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압상트의 반입을 금하고 있으나 혹시라도 그 맛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페르노’를 찾으면 된다. 압상트를 처음 판매했던 ‘페르노피스’사에서 만든 이 제품은 맛과 향이 압상트와 거의 차이가 없으면서 유해 성분을 제거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마실 수 있다.

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11-17 11:44


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sejinjeong@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