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타인이 되지 못한 클레멘타인의 노래가족이라는 형벌을 묵묵히 짊어지고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고독한 여성

[문학과 페미니즘] 조경란의 <내 사랑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이 되지 못한 클레멘타인의 노래
가족이라는 형벌을 묵묵히 짊어지고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고독한 여성


1996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단편 ‘불란서 안경원’으로 등단한 조경란은 섬세한 시적 문체로 주목 받아 왔다. 제 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인 장편 ‘식빵 굽는 시간’ 등 음식과 요리에 관한 섬세하고 독특한 묘사와 사유는 그의 특징적 일면이다. 이야기보다는 부유하는 이미지들이 두드러지는, 서사이면서도 상당히 서정적인(시적인 상징과 묘사가 얽혀 있는) 그녀의 소설은 주제나 메시지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은 조경란이 많은 소설들에서 다루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가 가장 중심에 놓여진 중편 소설이다. 그의 많은 소설들에서 주인공들(대부분은 ‘그녀’)은 이미 처음부터 존재 지워진 가족이라는 불행에 갇혀 있다. 하나 같이 비사회적인 그녀들은 가족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지만, 그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데에는 언제나 소극적이다. 그들은 삶이라는 모순, 특히 가족이라는 운명론적 공간의 모순을 그저 묵묵히 견디며, 자폐적인 내면 공간을 형성하여 그 속에서만 부단히 서성이고 배회한다. 그리고 조경란 소설의 핵심은 그 서성임 속에 있다. 담담하게 서술되는 은밀한 독백의 공간으로 들어 가 본다.

“가족들과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한다는 건 얼마나 낯설고 우울한 일인가”
여기 서른 한 살의 ‘그녀’가 있다. 그녀가 사는 건물 1층에는 집안을 꾸려가는 그녀의 직장, 피아노 학원이 있고, 2층에는 “아침 저녁으로 마주쳐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가족들이 있다. 일명 치매라고 불리는 알츠하이머병을 앓은 지 5년이 된 아버지와 다리를 절며 나날이 살이 찌는, 한숨과 무표정만이 전부인 어머니, 늘 집밖으로 겉돌아 집에서도 자신의 방을 벗어나지 않는 여동생 해연,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버린 남동생 석준까지가 그 가족의 구성원이다.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은신처는 옥탑방. 1층의 직장과 2층의 가정, 오롯이 자신의 공간인 옥탑방까지만을 움직이며 그녀는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다.

“그 병을 통해 인간이 가진 존엄성을 상실”한 아버지는 단 몇 초도 기억을 지속하지 못하고, 오줌을 못 가릴 뿐 아니라 집을 나가 버려 애를 먹이기 일쑤에, 돌발적 사건들을 연이어 벌인다. 그런 아버지, “자살도 못 하는” 아버지에게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다. 어떤 연민도 끓어오르지 않는다.” 집안에는 “죽음의 냄새”인 한약 냄새가 배어 있고, 늘 무표정으로 말도 시선도 좀처럼 살아 있지 않은 어머니는 한숨만을 내쉰다. “그녀는 어머니의 눈빛을 바라 보고 싶다. 그 눈에 담겨진 것들을 훔쳐보고 싶”지만, “어머니는 그녀를 쳐다 보지 않는다.” (자신은 모르지만) 배다른 동생인 해연은 아버지가 행패를 부릴 때마다 “적의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이며 곧 집을 떠날 생각을 하고, 막내 석준은 중국에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를 좀 잊어 줘”라는 편지를 보내온다. 몇 년을 사귄 연인도 “너를, 아니 네가 처한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라고 말하며 결별을 선언한다.

그런 그녀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삶의 어떤 진부함”을 견디고 있을 뿐으로, “우울증을 견디는 것보다 인내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적나라한 쓰라림”을 “아무런 꿈도 미련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감추고 사는 그녀. “마치 혼몽한 낮잠을 자고 있던 새에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끌어다 이 곳에 부려 놓고 떠나버린 느낌”만을 힘으로, 그녀는 자신이 “손 쓸 수도 없이 늙어 가고 있”음을 받아 들인다. “기껏 집을 떠나는 게 너의 꿈이었니?”라고 자문하는 자의식만을 버팀목으로 삶의 고통을 견딘다.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모든 세상과 단절되고, 스스로를 유폐시켜 친구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우연히 전화를 잘못 걸어 온, 얼굴도 모르는 여자이다. (실은 3년 전에 죽은) 연희를 찾는다며 전화를 걸어 온 여자에게 그녀는 가족끼리 김밥을 싸서 소풍을 갔다는 둥, 실없는 거짓말과 이야기들을 늘어 놓는다. 어쩌면 세상과 단절된 그녀 속의 또 다른 누구일지도 모를 여자에게 그녀는 “아무 말”들을 한다. 소통을 간절히 원하지만 결코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고독한 자폐증적 자아들이 그녀 안에서 서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설은 불협화음을 내는 우울한 그녀의 가족을 상징하는 도구로, “가족 사진”과 “방문 닫히는 소리”를 제시하고 있다. 화목과 행복의 상징이 되어야 할 가족 사진에서 그들은 웃는 대신 무표정하다. 그 사진을 보면 웃음이 번지는 대신, “허탈감과 어색함”만을 곱씹어야 한다. 사진을 찍자마자 아버지가 오줌을 지리고, 그를 수습했던 일들. 집에 돌아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며 내던 “둔중하고 차갑고 조금은 쓸쓸했던 방문 소리”만이 “더 생생하게 기억나곤” 하는 사진이지만, 그녀는 그 가족 사진을 보이지 않게 치우지도 못한다. 매번 그녀를 절망시키는 “아아, 저 문소리”도 늘 속수무책이다.

쓰러져가는 것들을 끌어 안고, 묵묵히 서성이기
평생을 수위로 일하며 “도시 곳곳에서 파수꾼 노릇”을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가족조차 지킬 수 없이 허물어져 가는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직접 지은 그들의 집도 “허술하게 무너지고 있”다. 장마비로 물이 새고, 아버지가 가꾸던, 진초록빛으로 눈부시던 화초들은 모두 죽는다. “오래 전에 누군가 살림을 걷어 치우고 도망간 집이 꼭 이럴까. 천장이 뚫어지고 얼룩진 벽지가 너덜거리고 자리를 잃은 장식장이 제멋대로 서 있는 집은 마치 흉가 같다.”

그런 집에서 가부장의 구조는 장녀인 그녀를 중심으로 재편되지만, 그녀는 장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도 집을 떠나지 않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동생 해연은 집을 떠날 궁리를 하고, 이 집의 유일한 아들인 석준은 다시는 가족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만을 한다) 그저 묵묵히 집을 지킨다. 그녀에게 가정이란 권위나 화목을 구가할 공간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운명을 감내해야 할 공간이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면서 태아의 소리들을 내는, 점점 몸도 작아지고 채 6살도 안 되는 인지 능력을 지닌 아버지와, 이미 떠나버려 부재로서만, 우울한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소설 속 유일한 남자들인) 남동생과 연인까지도 그녀는 그저 묵묵히 받아 들인다.

새로운 생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껍질을 모두 뜯어 먹는 무당벌레처럼, 그녀도 집을 떠나는 삶을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급기야 아버지를 버릴 시도까지도 하지만, 결국은 아버지와 함께 할 지진하고 형벌 같은 일상을 선택하고 만다. 그리고 그녀는 역설적으로, 어쩌면 아버지가 감춰 둔 것인지도 모를, 가장의 권위가 빛나는 아버지의 문패, “단 하루도 대문에 걸려 있지 않았”던 그것을 대문에 내건다. 단 한 번도 문패가 걸리지는 않았지만, 문패만을 위해 예비되어 있었던 “녹슨 못”에다 말이다. 문패를 거는(아버지의 권위를 복원 혹은 처음으로 내세우는) 상징적 제의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될 삶의 고통을 견딜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늙은 아비를 홀로 두고 영영 어디를 가버리지만, 그녀는 단 한 발자국도 아버지와 집을 떠나지 못한다. 그녀는 내 사랑 클레멘타인이 되기보다는, 묵묵히 늙은 아비를 지키는 딸이 되기를 선택한다.

고독을 온 정신과 몸으로 살아내며, 그저 묵묵히 삶을 견디는 조경란의 그녀들. 삶의 모순과 불협화음을 받아 들이는 것마저 다분히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소극적인 그녀들. 그녀들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스스로 유폐되어 그저 자신의 공간과 내면을 끝없이 서성인다. 나는 그 서성임들에 가만히 눈을 댄다. 그녀들의 실존은 오히려 그 서성임 속에서 피어나고 있으므로.

** <불란서 안경원> 조경란 소설집, 문학동네, 1997.

** 무당벌레의 애벌레는 자기가 깨고 나온 알껍질을 모두 뜯어 먹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소설 속 그녀는 무당벌레가 되어 자신의 집을 뜯어 먹는 꿈을 꾼다. 그녀를 세상에서 철저히 단절시키는 집과 가족을 없애 버리고 싶은(그러나 없애지 못하는) 욕망의 발현이었을까? “그녀는 한 마리 무당벌레다. 이제 갓 알에서 깨어나온 그녀는 꿈틀거리면서 제가 깨고 나온 알껍질을 뜯어 먹기 시작한다. (…) 탄생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려야만 한다. 이것은 본능이다. 탄생을 위한 처절한 축제다. 새로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2-01 13:33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w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