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처럼 달콤한 生에의 집착자본주의 득세로 몰락해가는 귀족의 삶, 귀족적 맛의 열매
[문화 속 음식기행] 안톤 체홉 <벚꽃동산> 체리 체리처럼 달콤한 生에의 집착 자본주의 득세로 몰락해가는 귀족의 삶, 귀족적 맛의 열매
‘4월은 잔인한 달’. 봄만 되면 많은 이들이 인용하는 말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은 것 같다. T.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에서 따온 이 구절은 원래 “‘죽음’을 준비하는 이에게 생명이 시작되는 봄은 잔인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극작가 안톤 체홉이 ‘벚꽃 동산’에서 묘사한 봄도 이처럼 잔인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몰락해 간다. 체홉의 작품들 중 가장 원숙미를 보여주고 있는 ‘벚꽃 동산’이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개월 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어쩌면 그는 만년에 느꼈을 시작과 끝에 대한 성찰을 이 작품 속에 녹여낸 것은 아닐까. 19세기 말 러시아 남부의 한 작은 영지.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는 이곳은 한때 풍요로움과 활기로 넘쳐 났었다. 그러나 귀족의 시대가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자본가의 세상이 열리면서 아름답던 벚꽃 동산도 그 속에 사는 사람들처럼 초라해져 가고 있다. 이야기의 비극성을 더해 주는 것은 몰락을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 등장 인물들의 헛된 몸부림이다. 지주 라네프스카야 부인을 비롯한 주인공 일가는 이미 파탄에 이른 경제적 상황에도 귀족으로서의 자존심과 화려했던 시절의 추억에 집착한다. 이들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외동딸 아냐를 부잣집에 시집 보낸다는 등의 허황된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그들이 지키려던 벚꽃동산은 농노의 자식이었던 로파힌의 손에 넘어간다. 4막에서 라네프스카야 일가는 벚나무들이 찍혀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쫓겨나듯 그들의 집을 떠난다. 차르와 귀족의 시대가 그 종언을 고하듯, 이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쓸쓸히 파리로 돌아가지만 아냐는 대학생 트로피모프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달려간다. 벚꽃 동산이 누렸던 한때의 영광은 늙은 하인 피르스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진다. 봄날에 만발한 벚꽃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체리를 수확해 설탕에 절이거나 잼을 만들던 시절이 얼마나 활기차고 생기에 넘쳤는지…. 그러나 그때의 달콤한 체리 맛은 시간의 흐름 앞에서 씁쓸한 뒷맛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화사한 꽃이 진 뒤 열리는 달콤한 열매 체리는 그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 때문에 여러 가지 디저트에 장식용으로 많이 쓰인다. ‘마더 구스(mother goose)'라는 동요집을 보면 “빨간 외투에 목에는 돌이 매달려 있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신사는 누구인가?”라는 수수께끼가 실려 있는데 그 답이 바로 ’체리‘이다. 그만큼 체리는 서양인들에게 옛날부터 친숙한 과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체리는 병조림이나 프루츠 칵테일로 만든 것이 전부였는데 요즘은 값은 비싸지만 백화점 등에서 신선한 체리를 구할 수 있다. 큰맘 먹고 체리 한 봉지를 사 왔다면 그냥 먹는 것도 좋지만 조금 사치스러운 과자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입력시간 : 2005-03-0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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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sejinjeong@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