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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페미니즘] 윤대녕의 <빛의 걸음걸이>
빛의 걸음걸이를 따라 펼쳐지는 생의 미세한 기미들
존재의 시원에 닿고자 하는, 고요하지만 집요한 시선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윤대녕 소설집, 생각의 나무, 1999.

도무지 줄거리가 중요치 않은 소설이 있다. 현실과 환상 혹은 몽상의 이음매 따위도 중요치 않은 소설. 처음과 끝도 분명치 않고, 그저 선연한 하나하나의 문장만이 어느 삶의 자락을 묵묵히 응시하고 묘사해 이야기의 맥을 겨우 이어가는 소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연한 이미지들은 오히려 선명한 인상으로 각인된다. 바로 윤대녕의 소설이 그러하다. 지난 90년대 한국 소설을 그를 제외하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윤대녕은 새로운 상상력과 형식, 너무나 신선해 독자를 아연하게 만드는 독특한 언어를 펼쳤다. 문학에서 형식이 곧 의미라는 사실, 문체가 곧 소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몇 되지 않는 소설가들 중에 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점. 윤대녕은 늘 여성을 말한다. 그의 소설은 항상 남성의 시선이나 목소리로 서술되지만, 그 남성이 뒤좇거나 그리워하거나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언제나 여성이다. 혹은 여성의 이미지이다(여성들은 자칫 지나치게 이미지화되어 개별적 실체감을 잃기도 한다). 때문에 윤대녕 소설에서 여성이 신비화되고 미화되는 점은 여실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여성이 존재의 시원으로 향해 있거나 맞닿아 있거나 혹은 길을 열어주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존재의 근원을 향한 그 ‘부단한 걸어감’에 윤대녕 소설의 열쇠가 있다. 이미지에의 집착 혹은 유영, 향유는 존재의 본원과 정수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더듬어가는 ‘부단한 걸음걸이’에서 자연스레 번져나오게 된다.

- 빛을 따라 걷다
윤대녕의 작품 중 1998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고즈넉하게 아름다워 정신을 온통 잃게 만드는 단편 <빛의 걸음걸이>를 따라가 본다. 이 소설은 빛으로 만들어지는 은근한 율동들을 따라가며 시간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마치 화폭 속에 그림을 그리듯 담아낸다. 시간에 따른 빛의 인상들이 화폭을 지배하는 인상주의 회화처럼, 소설 속에서도 시간과 빛은 어우러져 전체의 이미지를 발산해낸다.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 아버지(64세), 어머니(62세), 큰딸(38세), 아들(36세), 막내딸(33세). 소설은 각각 타인이 되어버린 이 다섯이 평면도에 그려진 집 속에 담겨 살아내는 단 하루의 시간을 좇고 있다. 아들인 ‘나’의 시선과 목소리는 작은 남향집에서 하루 동안 빛이 걸어가는 추이를 꼼꼼하고 나지막하게 밟아간다. “이윽고 정오가 되자 화단엔 검불만한 그림자만 몇 올 남고 크레파스를 마구 분질러놓은 것처럼 빛들이 화사하게 튀며 서로 엉킨다.” “화단은 상기 모네의 붓질처럼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해바라기 방으로 들어와 하오의 나른한 빛이 장독대를 적시며 뱀처럼 꾸물꾸물 담을 타넘어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얼핏 안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낯선 흐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가.” 와 같은 미문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독자로 하여금 ‘빛의 걸음걸? 瞼??새삼 느끼게 만든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밝은 아침 햇살이 되고, 다시 눈부신 정오를 지나 나른한 오후의 햇살로 변해간다. 이윽고 드리워지는 어스름과 어둠. 하루라는 시간이 그렇게 흐르는 사이, 빛은 걸음을 걸으며 이울어간다.

- “상처, 어차피 모든 그리움은 상처의 원인이다. 나중에 상처로 변해 그리웠던 만큼 가슴에 남게 된다. 그걸 떠안고 누구나 살아가게 된다.”
그 걸음을 일련의 소소한 사건들과 어떤 순간마다 다시 살아나는 과거의 기억들이 함께 한다. 미세하게 포착된 삶의 기억들과 그리움들이 그것이다. “잃어버린 내 유년의 해바라기 밭이 존재하고 있”는 누나와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에 대한 기억, “셋방 쪽마루에 앉아 처마 사이로 붉은 노을을 올려다보며” 함께 <오빠 생각>을 불렀던 기억. 감나무 아래에서 수음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다 “?한 점 없는 새까만 내가 몹시도 서글펐던” 날 “맥없이 흐느껴 울기도 했”던 기억들이 내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기억과 그리움의 힘으로, 과거를 덧씌운 현재의 삶들은 은근한 생명을 얻는다. 힘든 생을 살아가는 누나는 “어머니가 죽고 나면” “?마음속 低鍛區굅?될 “따뜻한 두부 같은 사람”이라 명명되고, 늘 “누에고치처럼 늘 제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말 없는 여동생은 “벽에 걸려 있는 저 모네의 그림 속에. 안개 서린 저 고요한 빛의 잔주름 속에” 사는 것이라 여겨진다. “나이를 먹어도” “꿈이 생시요 생시가 곧 또 꿈”인 “꿈처럼 사”는 나. 그런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한 여자를 추억한다. 발리의 그녀에게 나는 그리움을 안고 속삭인다. “얘야. 오늘 난 우리 집의 평면도를 그려놨어. 언젠가는 햇빛을 받아 누렇게 색이 바래고 두루마리 안으로 말려버릴 테지. 우리들 인생처럼. 그러고 나면 이 집과 함께 했던 우리 세월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겠지. 하지만 나중에라도 왠! 지 너만은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 해바라기 밭에서 찍은 사진도 네가 가지고 있다는 걸 난 알아. 어느 여름날 우리는 해바라기 푸른 대궁 사이에 숨어 겁 없이 입을 맞췄지. 너는 그 큰 눈으로 일생(一生)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혹은 내가 너를.” 이렇듯, 과거와 현재가, 현실과 환상이 그렇게 서로의 경계를 지우며 소설이라는 하나의 그림을 그려낸다. “어차피 모든 그리움은 상처의 원인”일 터이니, “나중에 상처로 변해 그리웠던 만큼 가슴에 남게” 될 터이니, “그걸 떠안고 누구나 살아가게” 될 밖에. 그러니 현재란 언제나 과거와 함께 유영하는 것일 밖에.

이런 추억의 편린들이 펼쳐지는 한편으로 빛은 사위어지며 그와 함께 하나의 생이 서서히 저문다. 어머니는 하루의 진행 동안 평상시 하지 않았던 행동과 말들을 하며 죽음에 가까이 간다. “서서히 마당의 빛이 걷히고 이불보 같은 어둠이 내려앉”고, “신발도 없이 밖에서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해바라기 지붕을 밟고지나 마당과 화단을 밟고지나 장독대를 밟고지나 상기는 담을 타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과 맞닿아 있는 어둠에 대한 마지막 서술. “밤의 발자국 소리가 도로 돌아와, 내 머리맡에 바투 와서 어깨를 흔”들 무렵, “밤이 내 귀에다 대고 하는 소리를 캄캄히 엿듣고 있”던 내게 들린 것은 “갔어!”라고 외치며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아버지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빛이 어둠에 물들어가고, 삶이 죽음에 가만히 자리를 내어주는 시간적 추이들이 아름다운 하나의 그림이 된다. 시간은 빛이라는 물질로 인해, 마치 살갗을 스치듯 선연하나 고요하게 흘러가고, 미묘하고 섬세한 서술들이 그에 삶의 무수한 편린들을 덧칠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인 흰 고무신(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방으로 가지고 들어오라고 한)은 마치 시간과 빛이 응결된 하나의 물체인 듯 고즈넉하게 빛을 발하며, 소설의 진행 속 등장한 어릴 적 여동생의 흰 운동화, 누나가 폐병에 걸려 먹었다는 하얀 두부, 인도네시아 여인의 하얀 신의 ‘흰’ 이미지와 어우러진다. 마치 빛의 색깔인 듯, 그것들은 소설 전체에 하이얀 빛의 색을 더한다.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미지의 여인까지 흰 색깔로 갈무리된 그들의 삶의 기미들, 죽음의 기미들은 빛, 시간과 함께 엮여 한 폭의 인상화가 되어 남았다.

소설은 이 평면도와 더불어 시작된다. “스물여섯 살 이후 내게는 집이 늘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곳이었다. 거꾸로 내가 다닌 세상의 모든 곳은 돌아가기 위해 떠나오는 곳이었다”는 서술과 함께 나는 “가족이란 것도 하나의 소우주며 외로운 행성에 속한다는 걸 이즘 와서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이 평면도에는 “이십오 년 간 내 일가족의 과거와 현재가 고스란히 공존하고 있다.” 갖가지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와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가 안방에, 산후조리를 하는 여동생이 동쪽 방에, 폐병이 들어 이혼을 하고 “부역하는 죄수처럼 동생의 산후조리와 어머니의 병 수발”을 하는 누나가 서쪽 방에 있다. 그리고 해바라기방에는 “부모형제와도 어쩔 수 없이 반쯤은 타인인 나이가 돼버려” “이제는 그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들이 터무니없이 잔뜩 생겨” 버린 내가 있다.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모여 방 네 개가 모두 찼지만 분위기는 아무래도 어수선”하고, “마루엔 괴괴한 적막이 빈 항아리처럼 도사리고 앉았다 사라지곤” 하는데….

소설은 하루라는 시간 동안 빛이 집을 지나가는 여정을 묵묵히 밟으면서, 이 평면도에 빛을 먹여 그것을 입체로 되살려낸다. 서서히 늙고 병들어 어둠으로 가까이 가는 부모, 세상을 살다 잠시 돌아온 아들과 딸들. 그들을 단절지우는 벽들과, 온전하고 은밀한 각자의 공간을 제공하는 방들. 그 모두에 고루고루 빛이 걸어간다. 이윽고 어둠이. 결국 시간이.

오래 전부터 여동생의 방에 걸려있는 복제 그림,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이제 “오랜 세월 문장” 같다. 소설에서 몇 번씩 언급되지 않는다 해도, 빛의 움직임을 따라간 섬세한 터치가 돋보이는 이 그림. 빛이 만들어낸 인상을 은은히 자아내는 <인상, 해맛?는 소설 <빛의 걸음걸이>와 닮아있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


입력시간 : 2005-03-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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