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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페미니즘] 김연수의 <첫사랑>
순수를 떠나고서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순수, 첫사랑


찬란한 봄.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지는 계절. 봄을 사랑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한창 청춘일 때에는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그 때가 그랬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데는 또 다른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대상에서 어느 정도 충분히 멀어져야 그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찬연하게 눈부신 이 봄을 ‘첫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찰나에 완성했으나 결국 두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 허망한 꿈 같지만 영원히 가슴 속 한 켠을 차지하게 되는 강렬한 경험, 과거에는 분명 치열하게 존재했으나 현재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향수, 연민, 애련까지도 ‘첫사랑’이라 할 수 있다면 앞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의 갈피를 헤집으며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연다. 아니, 그 ‘첫사랑’을 끌어안게 된 시간의 이야기란 말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1993년 등단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신세대 소설’에 주력, 장편 ‘?A빠이, 이상’등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지적으로 잘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연수. 그의 두 번째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작가의 소설 쓰기 10년이 결코 허술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제목이 말하듯 유년기의 추억과 기억을 길어올려 연작으로 구성한 이 소설집은 2003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그 중 ‘첫사랑’은 첫사랑의 환희와 고통, 환멸과 폐허를 거쳐 결국 그 아름다움을 긍정하게 되는 시간들을 담고 있다.

“마이너스의 무게를 가져 한없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적인 아름다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했던 화자는 자수를 결심하고는 그 전 날 자신의 첫사랑에게 편지를 쓴다.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만 한다는 초조한 마음이 나를 사로잡았으니까” 이 글을 ‘너’에게 쓰고 있다고 화자는 말하지만, 편지는 자신의 지나온 삶에게, 꿈에게, 혹은 아름다움과 순수에게, 또 무수한 깨어져버리기 쉬운 것인 ‘첫사랑’에게 보내는 연서라고 해야 할 법하다.

“최선을 다한 만큼 후회도 아쉬움도 없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잊혀지겠지. 두렵지는 않아. 견딜 수 있어”라며 편지는 시작된다. 또 하나의 첫사랑일지 모를 학생운동은 그렇게 전체의 배음으로 깔려 있다. 모든 첫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결국은 잊혀지겠지만 “최선을 다한 만큼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것, 아름답게 피어났으므로 처참하게 진다고 해도 결국은 긍정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 말이다.

첫사랑을 더듬어가는 여정은 일곱 살 때 나를 사로잡았던 이미지, 한 시위 현장에서 내가 사로잡혔던 나비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건 나비가 아니라 펄럭거리는 노란빛이라고 해도 좋을 거야. 어쩌면 잠시 나비 모양으로 뭉쳐진 금빛 먼지라고 해도 좋겠지. 마이너스의 무게를 가져 한없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좋아. (…) 나는 그만 그 나비에 끌린 거야. 작은 머리로는 도저히 지탱하지도 못할 그 연약한 더듬이가 나를 유혹했던 것인지도 모르지. 어린 나를 그 나비에게로 이끈 그 무엇을 일컬어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그게 무엇이든 나는 그 나비를 잡고 싶었어.” 그러나 나비를 잡지 못했고, 내가 본 것은 “나비의 잔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구겨진 더러운 휴지 조각 같은” 것이었다. 환상적이고 뭐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것, 그러나 한 순간에 참혹한 실체로 변해버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것. 그 나비의 이미지가 “그때 너를 처음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떠올랐다고 나는 고백한다. “우주 저편까지 퍼지는 수없이 많은 동심원들의 중심부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이 있었어. (…) 그런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목마름을 달래줄 그 무엇이었지. 그 무엇. 어린 나를 사로잡았던 노란 나비 같은 것.” 그렇게 내 사랑은 시작됐다. “나를 향해 환하게 뿜어 나오던 그 빛은 무엇일까? 오래 전의 그 나비처럼 그토록 연약한 빛은 아닐까? 잡으려는 생각이 혹시 아름다운 그 빛을 죽이게 되지는 않을까? 사랑은 왜 두려움과 함께 오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됐지.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아름다운 사랑은 망가져버리니까. 그리고 다시는 그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없으니까. 그게 사랑이라면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돼.”

“아름다움이란 그저 찰나에만 존재해. 영원한 것은 더럽고 야비한 것들 뿐이야”
그러던 어느 날 네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처참히 거부당한다. 너에 대한 나의 순수한 사랑과 갈망이 강렬했기에, 그 패배를 용납할 수 없었던 나는 너를 때리기까지 한다. 그것으로 모자라, 나는 내 사랑을 가장 먼저 눈치 채고 “너,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지?”라며 놀렸던 혜지 누나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준다.

천문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술집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혜지 누나. 여공으로 일하던 어느 날 동생이 알려준 대로 그을린 유리로 일식을 보다가 공장의 윗사람에게 “공순이 주제에 미친 지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왜 맞아야 하는지 모르고 매를 맞았던” 누나. “스무 살이 되던 날 소원이 고작 마음 놓고 일식을 보는 것이었던” 누나에게 나는 “남의 잔에 술이나 따르는 더러운 주제”라고 말하고, 누나가 자신에게 술을 먹였다고 어머니한테 거짓말까지 한다.

“세상에 어떤 동물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일부러 부수지는 않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망쳐버리는 동물은 사람 뿐이야. 그렇게 망가지는 꼴을 보니 신이 났어.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드디어 복수했다고 생각했어.”

그런 ‘첫사랑’을 지나오며 나는 “세상은 하나도 아름다울 게 없는 곳이었어. 아름다운 줄 알고 다가섰다가는 그만 그 더러운 꼴에 구역질이 나게 마련이지”, “나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었지. 웃긴 생각이었어.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어. 영양을 덮치는 들개들처럼 사람들은 아름답고 소중하고 정의로운 것이라면 달려들어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려. 짓밟고 때리고 뭉개고 나면 아름다움이란 그저 찰나에만 존재해. 영원한 것은 더럽고 야비한 것들 뿐이야. 푸른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정의란, 아름다움이란, 사랑이란 바다의 한때나마 꿈에 불과한 거야”라는 냉소를 되뇌며 살아온다.

“내 안을 충만하게 메운 그 따뜻한 느낌. 나는 그게 사랑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어. 나는 비로소 사랑에 빠진 거야. 알겠니?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첫사랑에 빠진 거야”
그러나 첫사랑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과정,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회상을 통해 첫사랑은 냉소를 넘어서는 하나의 지점에 도달한다. “나비를 짓밟아” 밑창에 “진물 같은 게 묻어 있던” 신발 한 쪽을 던져버린 일은 이제 나에게 “살아가면서 가끔 내가 던져버린 그 신발이 생각나. 그 신발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이튿날 남대천에 뿌려버린 죽은 반딧불이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혜지 누나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라는 의문으로 남는다. “젊음을 바쳐 우리가 꿈꿨던 세상을 반쯤은 이룬 것일까? 아니면 모든 게 이제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라며 나는 내 또 다른 첫사랑을 곱씹어본다.

소설은 오래 전 혜지 누나가 하고 싶어 했던 것, 유리판을 그을려 일식을 보는 것을 내가 실행하면서 마무리된다. “검은 그을림에 그 세기가 약해진 노란빛이 내 눈 안으로 들어왔어. 그 아름다운 빛이 내 속으로 밀려들어왔어. 까닭 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과 막연한 불안감이 하늘을 떠도는 먼지 알갱이처럼 내 안에서 서로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바뀌는 동안, 조금씩 둥근 원이 태양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 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 그제야 알 것 같았어. 혜지 누나가 동생과 나란히 서서 그을린 유리로 바라보려던 게 일식이 아니었음을. 그 순간부터 나는 새였고 물이었고 혹시는 바람이었어. 푸른빛이었고 바다였고 바다의 한때나마 꿈이었어. 내 안을 충만하게 메운 그 따뜻한 느낌. 나는 그게 사랑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어. 나는 비로소 사랑에 빠진 거야. 알겠니?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첫사랑에 빠진 거야.”

내가 “비로소” 도달한 첫사랑은 이제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다.” ‘첫사랑’의 환희뿐 아니라, 그 아픔과 고통, 냉소와 환멸을 다 거쳐온 시간들이 그 속에 축적됐기 때문이다. 눈부신 태양을 마주할 수 없어 유리판을 그을리듯, 첫사랑 또한 시간이라는 퇴적을 거쳐야만 그 아름다움에 다가갈 수 있어서 일까. ‘한때나마’라는 수식어가 ‘꿈’에 붙는 순간 그것은 어쩌면 영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첫사랑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지점, 오히려 그래서 그 첫사랑이란 더 숭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 그곳에 비로소 ‘첫사랑’이 태어난다. 꽃은 지기에 피어남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고, 이 찬연한 봄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소설집, 문학동네, 2003.

화자는 어느 날 무주 남대천에서 본 반딧불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데, 이는 소설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첫사랑'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온 저녁하늘로 그 은은한 따뜻함을 뿌리는 반딧불이들이 어찌나 예쁘던지! 아버지와 나는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잡아 준비해간 빈 병에다 넣었지. 한 마리씩 넣을 때마다 병 안의 공기는 신비스럽게 바뀌어갔어. 그 아름다운 빛을 머리맡에 두고 바라보다가 잠들었는데, 다음날 깨어보니 모두 빳빳하게 죽어 있었어. 그 아름다웠던 빛은 끔찍하게 생긴 곤충이었던 거야." 결국 첫사랑은 "하룻밤 짝을 찾는 반딧불이의 화려한 빛과 같은 것","다음날 날이 밝으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그 끔찍함이 순간의 찬연한 아름다움까지 희석 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시간을 퇴적 시킬 수 있는 힘, 기억과 추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


입력시간 : 2005-05-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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