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화장하는 그림쟁이 "기술이 아니라 감성을 담는 작업… 실험정신 필요해요"

결근 또는 지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늦잠을 자든, 밤을 지새든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본인 능력만 있으면 만사가 평화롭다. 학벌을 따질 일도, 로비도 필요 없다. ‘사람 스트레스’가 없으니 자유롭고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사람에게는 더 없는 천상의 직업이다. 다만 대가가 있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작업 스트레스’다.

“밤을 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8년 전에 동화책 일러스트를 맡았을 때는 나흘 동안 한 잠도 안 자고 밤샘 작업을 했다가 닷새째 날 후배랑 인사를 하다말고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은 적이 있었어요. 그땐 아직 작업에 숙달이 안 됐을 때라 더 무리가 갔었죠.”

이경국(39) 씨는 올해로 14년차에 접어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이다. 1995년 홍익대 목공예학과를 졸업, 비(非)회화과 출신으로 대학 재학 중이던 94년에 ‘출판미술가협회 신인대상전’의 대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았다. 지금까지 직접 삽화를 입힌 단행본만 약 50권, 시사주간지의 칼럼 삽화로부터 시작해 현재도 국내외의 유명 경제전문지, 월간지, 동화책 등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러스트는 크게 만화영화와 같은 애니메이션이나 단행본, 잡지 등의 출판미술, 그리고 3D등으로 이루어진 영상물에 사용되는 그림 작업을 말한다. 그 각각의 내용이나 의미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삽화, 사진, 도안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 일을 하는 이들이 일러스트레이터들이다.

대개 미술대 회화과 출신들이 많지만, 현실적으로 기본적인 회화 실력과 감각만 갖추고 있으면 굳이 미술대 출신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목공예과 출신으로 이 분야에 뛰어든 이 씨도 그런 경우다.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는 물감작업은 물론, 컴퓨터를 이용한 꼴라쥬 기법이나 실제 사진과 컴퓨터 그래픽을 접목하는 기법 등 다양한 응용력과 독특한 표현기법이 그의 차별화된 강점이다.

일러스트가 가장 부각되는 장르는 역시 출판미술 분야.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진정한 작가로 평가받는 장르이며, 일러스트레이터 자신에게도 작업의 결실이 가시적으로 보존되는, 작가로서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동화책의 경우 특히 일러스트의 비중이 높다. 동화책을 고르는 기준 자체가 대개 그림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동화에 어떤 그림을 입혀야 할지, 모든 아이디어 구상과 그림 작업은 오롯이 혼자 힘으로 고민하고 풀어야 할 문제다.

“일러스트레이션은 기술이 아니라 감성을 구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배운다거나 가르쳐준다는 게 성립되지 않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일러스트 작가에게는 보조원이나 문하생의 개념이란 게 없어요. 어차피 작가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일이니까요.”

출판사로부터 의뢰가 들어오면 먼저 글자로 된 원고내용을 훑어본다. 원고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머릿속에는 각 내용에 어울릴 그림들이 소리없이 그려진다.

정식 계약이 이뤄지면 곧바로 스케치 작업에 들어간다. 동화책의 경우 1권당 대개 총 28페이지. 앞 뒤 페이지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전체의 흐름을 맞춰 나간다. 스케치 작업만으로도 이르면 1주일, 출판사의 사정에 따라 길게는 8개월을 넘기는 책도 있다.

1차 스케치에 대해 출판사 측이 마음에 들면 바로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가 시작된다. 실제로 그림의 모양을 만들고 색을 입히는 과정이다. 이때부터 작업이 힘겨워진다. 생각해 낸 그림을 어떤 기법으로 표현할지 아이디어를 내는 데만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빽빽한 데다 특유의 질감이 독특한 동물들의 털 그리기는 정말 피곤하다. 짧으면 3, 4일 길면 5일까지 걸리기도 한다. 더 잔 손질이 많이 가는 건 사람이 등장하거나 생활에 관계된 장면이 등장할 때다. 일상적인 모습 한 컷에도 하루가 꼬박 걸린다. 사람의 감정 표현은 특히나 까다롭고 복잡하다.

얼굴 표정이며 손짓, 발짓 등 구석구석에서 묻어나는 감정 표현을 자연스럽게 담아내자면 일러스트의 머리가 지끈거린다. 사실적인 생동감을 얻기 위해 걸핏하면 후배나 가족을 동원해 필요한 포즈로 사진을 찍은 뒤 이를 따라 그리기도 한다.

일상적인 세상 풍경을 담을 때도 전신주의 전깃줄 사진 따로, 건물 외벽 사진 따로, 실내의 청소 장면 따로, 그렇게 각각 촬영한 사진을 한데 모아 마치 퍼즐을 짜맞추듯 진행된다. 시선의 높낮이를 통일하며 연결한 뒤 다시 컴퓨터 장비로 꼼꼼히 손질해 한 장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동화 ‘걸리버 여행기’ 표지를 만들 때는 소인국에서 붙잡혀 누운 채로 결박된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후배한테 똑같은 자세로 눕게 해서 사진을 찍어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자세에서의 바지 구김이나 손의 위치, 손가락 모양, 얼굴 표정, 각도 등을 실제 그대로 표현해야 실감이 나니까요. 사람을 표현하기란 워낙 복잡해서, 손가락 하나 제대로 그리는 데도 10년의 내공이 쌓여야 합니다.”

걸리버 표지 작업 하나에도 잠 한 숨 못 잔 채 꼬박 이틀이 걸렸다. 포토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이 그나마 물감작업보다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사진을 미리 촬영하거나 뒷손질하는 작업도 만만찮은 노동이다.

맡은 작업은 많고, 그림 하나하나가 워낙 세밀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다보니 주어진 시간 내에 만족스러운 그림을 얻자면 과로를 피할 수 없다. 99년 방송사의 뉴스 시보에 쓰일 모 이동통신사의 15초짜리 영상 광고 애니메이션 터치 작업을 맡았을 때, 이 씨는 4일 만에 그림 500장을 그려내야 했다. 컴퓨터 폐인처럼 편집실에 틀어박혀 잠도, 밥도 챙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거의 졸도 직전까지 가서야 비로소 작업이 끝났다.

“그래도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애니메이션이 TV로 방송되는 걸 보노라니 그토록 힘들었던 고생도 다 잊고,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그 광고가 10개월 동안 방송됐었죠.”

2001년 사진학과 석사과정을 시작한 것도 자신의 일러스트 영역에 사진이라는 재료를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해보기 위해서였다. 완전히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물감작업에 비하면 사진을 활용하는 작업은 시간 대비 작업량, 또는 시각적 효과면에서 아주 매력적이다.

이 씨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비교적 단시간에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일찍부터 디지털 작업을 시도하며 그간 물감작업 일변도였던 출판미술시장에서 민첩하게 탈피한 영향이 크다. 이 씨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포토샤퍼, 포토 일러스트레이터로도 불리는 디지털 전사다.

기본적인 체력 소모 외에 가장 혹사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눈이다.

그는 거의 매일 아침 11시부터 자정까지 평균 12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하루 18시간씩 일했던 것에 비하면 호사다. 식사도 대충 때운다. 시간에 ?겨 밤을 새거나 새우잠을 자는 건 부지기수다. 수면 부족에다 전자파, 안구건조증으로 눈이 자주 충혈되고 아프다. 배불뚝이 화면인 ‘CRT 모니터’ 시절에는 수시로 안약을 넣으며 근무했다.

평면 모니터가 시판되고 난 뒤부터 다행히 한결 견딜 만해졌다. 컴퓨터는 특히 디지털 일러스트레이터 이 씨에게 가장 중요한 장비다. 매킨토시 컴퓨터 시절에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16번이나 바꾼 경험이 있다.

일러스트 작업이 완료되면 이를 출판사에 보낸다. 최종 OK 사인을 받아야 비로소 일이 마무리된다. 이 씨의 대표작들 중 2004년에 발행된 ‘이솝의 여우이야기’는 특히 출판계로부터 크게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다들 ‘마치 외국인 솜씨 같다’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현재 한국 출판시장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예상보다 많다.

이 씨가 거래한 출판사의 50권짜리 동화 시리즈물의 경우 약 80%가 러시아나 미국계 등 외국인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작업한 것들이다. 한국의 일러스트 업계에도 이제 FTA 협상에 뒤따른 시장 개방 문제와 한국 작가들의 생존싸움이 발등의 불이다.

“그런데 저 역시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이렇게 수없이 많은데 왜 굳이 외국인을 찾을까?’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개 비슷비슷한 한국 작가들의 그림과는 달리 같은 돈을 받아도 외국 작가들은 훨씬 개성 넘치고 독특한 작품을 내놓아요.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경쟁에서 살아남자면 우리 스스로 철저히 변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러스트 시장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일감 의뢰가 넘쳐 번번이 거절해야 하는 인기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배고픈’ 작가들이 공존하고 있다.

“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잘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을 잘 관찰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단적으로, 배고픈 작가들의 그림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림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죠. 세상의 요구는 계속 바뀌는데 작가는 계속 제자리에만 있으니 배고플 수밖에 없죠.”

이 씨 자신에게도 힘겨운 시절이 없었던 게 아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선 초창기에는 월 수입 20만~30만원으로 살았던 적이 있다. 애써 그린 그림에 대해 의뢰사 측이 대여섯 번 퇴짜를 놓고 수정을 요구할 땐 ‘고작 5만원을 벌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가슴이 울컥거리기도 했다. 8개월 넘게 작업한 수십 장의 그림이 결국 출판사의 사정으로 출간이 무산되었을 땐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 붓을 꺾어버렸던 그다.

“지금도 신참에게는 출판사 측이 일부러 그런 식으로 ‘훈련’을 시키기도 합니다. 당장은 서럽고 고달프겠지만 그런 시기를 잘 견뎌야 나중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는 거죠.”

요즘 특A급 일러스트레이터의 경우, 단행본 1권 작업에 1,000만원을 받는다. A급일 경우 1권당 수입이 600만~700만원선이다. 본인이 실력을 갖추면 넉넉하게 대우를 받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씨는 한 마디 조언을 덧붙인다.

“왕도가 따로 없습니다. 무조건 많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독창적인 기법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써보지 않은 그림 재료나 방식, 소재 등을 이용해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하면서 자신만의 일러스트를 창출해내야 합니다.”

일러스트라는 정글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법이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려면>

이 분야는 현재 공식적인 채용 방법이 따로 없다. 본인이 출판사 등에 찾아가 일감을 구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취업 방법이다. 대신, 일단 일정한 경지에 올라 업계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때부터는 외부로부터 먼저 작업 제의가 들어온다.

기존의 일러스트 관련 학원들은 주로 학습지용 일러스트 실무를 가르치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단행본 일러스트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일러스트의 본질적인 개념과 철학을 가르치는 문화센터가 한 군데 있으나, 이곳 역시 수료 후 취업은 본인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글·사진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