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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 46] 宣城 金氏 撫松軒 金淡 (선성 김씨 무송헌 김담)
19대 종손 김광호(金光昊) 씨
영주서 가장 현달한 명가 '삼판서 고택' 복원에 벅판 감회
새 종택으로 곧 환향… 세명의 판서 배출 명당 시민 힘으로 복원 진행





“우리가 영주에서 주인 노릇을 했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영주군수 할래 문절공(文節公) 종손 할래 하면 군수 안 한다고 그랬어요. 요즈음에는 종가에 시집도 안 오려고 하지만은.”

자긍심이다. 사랑방에서 어릴 적에 듣던 이야기를 수십 년 만에 다시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선성(宣城)은 안동 예안(禮安)의 별칭이다. 지금도 선성현 아문 건물이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 남아 있다.

그곳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이 들어서 명실상부한 한국학 연구의 요람이 되었다.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까지 예안 면이 있었다. 예안은 퇴계 선생의 고향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에 불과하지만 유림 사회에서는 ‘특별시’와 같은 대접을 받아왔다.

예안은 글자로만 보아도 정이 가는 지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안동댐 건설로 대부분 수몰되어 지금은 행정 명으로 남아 있지 않다.

예안을 관향으로 쓰는 대표적인 성씨가 김 씨와 이 씨인데, 지금까지도 명성이 자자하다. 안동을 달리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불린다. 이는 퇴계 선생을 위시해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인데, 영주 지역 역시 추로지향으로 함께 불린 예가 있다.

영주는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회헌 안향 선생의 고향이다.

퇴계 선생 역시 이곳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최초의 사액서원을 만들었고 또 자신이 직접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구상해 완성했다.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수많은 후진을 양성했음은 물론이다. 영주가 양반고을로 불리는 이유다.

조선 시대의 양반가문에는 그 격이 있다. 그렇다면 최고의 격을 유지한 문중은 어디일까? 안동에서는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영주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선성 김씨 문중이라는 말한다. 만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 사람은 영주의 전통문화에 정통하지 않은 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혹자는 안향 선생을 배출한 순흥 안씨가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흥 안씨의 전성기는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영주군지를 펴서 보면 선성 김씨의 현달함에 놀라게 된다. 대표적 인물이 무송헌 김담과 현손인 백암 김륵이다. 무송헌은 시호를 문절공이라고 받아 일반인들은 호보다 시호에 더 익숙하다.

그리고 백암 김륵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는 영남안집사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이들 두 사람은 영남을 넘어 나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를 ‘국사(國士)’ 또는 ‘두겁조상’이라 한다. 선성 김씨는 한 명도 나기 어려운 두겁조상을 두 명이나 모시고 있다.

영주의 선성 김씨를 대표하는 문절공 김담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조선의 표준역법 제정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또한 세종대왕 당시 집현전에서 17년간 재직한 대표적인 학자였다.

이러한 큰 어른의 종손이 사는 집을 수소문했지만 아는 이를 쉽게 만나지 못했다. 뜻밖이었다. 그러던 중 지손인 김태환 소백춘추(小白春秋) 편집국장을 만나 종손의 근황은 물론 많은 자료까지 얻을 수 있었다.

19대 종손 김광호(金光昊, 1947년생) 씨를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났다. 종손은 이미 필자를 알고 있었다. 종손은 소고 박승임 종가로 장가갔다. 소고 종손이 처남이다. 필자가 처남 관련 글을 쓴 것을 인터넷으로 읽었다고 한다. 종손이 객지에 나오게 된 사연부터 들었다.

“영주중학교를 나와 5년제 청구공전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뒤 영주시청에서 근무하다 지난 1983년 퇴직했습니다. 당시 공무원은 박봉이었죠. 그래서 대구로 나와 회사에서 일하다 퇴직해 지금은 붓글씨도 쓰고 선대 이력도 정리하며 소일하고 있습니다.”

종손은 자격증을 소지한 기술인이었다. 객지생활을 한 종손이 선대 이력을 어쩌면 이렇게도 잘 꿰고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평소 남다르게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방 한 쪽에 있는 두툼한 대학노트 한 권에 깨알 크기로 적은 선대 역사 사료를 통해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삼판서 고택’ 이야기를 종손에게 듣고 싶었다. 영주에 터 좋기로 제일이며 판서 세 명이 났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 옛집이었다.

이 옛집은 일찍이 삼판서를 내었고

김씨는 팔세(八世)를 이어 살고 있네

뜰 앞 연꽃 길은 큰 괴화나무 고목 남았는데

알고 보니 그때 덕 끼친 것 남은 것인 걸.

조선 후기 진사 정중원이 삼판서 고택을 지나며 읊은 시다.

일찍이 영주 구성산(龜城山) 아래 있던 대표적 고적(古跡)인 이 집은 서애 류성룡의 수제자인 학사 김응조가 ‘영주의 유일한 고적’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 명성이 있었다.

이 집은 고려 시대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鄭云敬, 삼봉 정도전의 부친)에게서 그의 사위로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에게 전해졌고 다시 황 전서의 외손자로 이조판서를 지낸 문절공 김담으로 이어졌다.

건물이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8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고적 중의 고적임에 분명하다. 정운경의 맏아들인 정도전이 1392년 유배지에서 돌아와 이 집에 거처하며 지은 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그루 배꽃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산새는 지지배배 이 봄을 노래하네

은둔자 홀로 앉아 무념에 빠지니

뜰에 돋은 풀만 한가롭게 바라보네.

그 시를 느껴보고 깊어 봄날 영주시 영주동 구성공원 남쪽 서천(西川, 乃城川)이 발아래로 보이는 둔덕을 찾았다. 고목으로 자란 아카시아 나무들마다 꽃이 만발해 향기가 주위에 가득했다.

그곳에 800년 역사를 간직한 삼판서 고택을 총 공사비 16억원을 들여 복원 중이었다. 이미 이건한 향토유적 제민루(濟民樓, 1433년 군수 潘渚 창건)는 제 형태를 갖추었다.

고택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선성 김씨들의 손을 떠난 그 집은 퇴락해 자취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영주의 대표적인 고적이었던 유서 깊은 고택이 세인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현실을 애석하게 여긴 시민들의 노력으로 지금 본래의 위치에다 복원 공사를 하고 있다.

‘선비의 고장’ 영주에 삼판서를 배출한 고택 복원은 의미 있는 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김주영 영주시장 역시 선성 김씨라는 것이다. 750여 평 대지에 정면6칸 측면 7칸의 팔작지붕 와가에 집경루(集敬樓)라는 옛 명칭을 게판한 고택을 구경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족보를 펴서 이 집 계도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19대를 이어온 면면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문절공은 자녀 3형제를 두었으나 위로 두 아들은 후사를 잇지 못했다.

조선 초는 후사를 잇지 못하면 양자를 하지 않고 무후로 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문절공의 종통은 당대에 셋째아들로 계승되었다. 그의 문집 자료가 풍부하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현손 대에 이르러 맏이 문절공의 백씨 집으로 출계해 다시 둘째집으로 이어졌고 7대, 15대에 이르러 각각 양자가 있었다.

18대 종손인 김조영(金祖榮, 1925-1974) 씨는 영남학파의 거유인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 1867-1952) 선생에게 수학했으나 정작 본인은 신학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렇지만 부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친은 풍재와 언변이 모두 뛰어났고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있었지만 어느 한 분야에서도 큰 뜻을 펴지 못하고 고향에서 삶을 마쳤다. 선친에 대한 종손의 애정은 남달랐다. “저는 아배 반도 못 되는 사람입니다.”

이야기 말미에 ‘역시 선성 김씨’라고 무릎을 치게 한 일화를 들었다.

“저도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판서 고택이 없어진 뒤 종가 건물이 없어요. 그런데 족조인 김학진(金鶴鎭, 1921년 생) 씨가 수도리에 마련해둔 와가 한 채를 종택으로 쓰라고 희사하셨습니다.

그 어른은 박종근(朴鐘根) 국회의원의 장인이십니다. 실업가로 지금 일본에 계십니다. 고마우신 어른입니다.”

경제력이 있다 해도 이렇게 확실하게 종가를 후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을 살 맛 나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선성 김씨 종가에서 들을 수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영주를 방문해 곧장 문수면 수도리(水島里)를 찾았다. 잘 가꾸어진 영주의 대표적인 반촌인 수도리에는 반남 박씨와 그 외손으로 후대에 입향한 선성 김씨가 어우러져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곳 반남 박씨 만죽재 고택 뒷집에는 잘 정돈된 반듯한 와가 한 채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곳이 문절공 선성 김씨 종가라고 말해주었다. 아직 주인이 이사오지도 않았는데 주민들은 벌써 큰 기대감을 갖고 환영하고 있었다.

종손은 딸만 셋을 두었는데 둘째만 미성이다. 환향을 앞둔 종손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으로 보였다. 종손의 태도는 바로 이 가문의 휘장과도 같은 ‘공경’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종손과 대화를 끝내고 돌아서면서 영주의 선성 김씨가 명문가로 이름을 떨친 원동력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보았다. 필자는 이를 종택 문루에 게판했던 집경루(集敬樓)에서 찾았다. 바로 공경할 경(敬)자였다.

이 이름을 지은 조선 후기의 학자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은 집경루 기문에서 “십년을 공경하다가 하루만 공경하지 않아도 욕을 당하게 되고, 십세(十世)를 공경하다가도 한 세대에 공경을 하지 않으면 그 집안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라고 했다. 19대를 이어오면서도 그 명성을 실추하지 않은 저력은 ‘공경’의 실천에 있었다고 본다.

김담 1416년(태종16)-1464년(세조10)
본관은 선성(宣城).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 시호는 문절(文節).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절의 지키며 세조 멀리해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은 태종16년 영주의 대표적 고적인 삼판서 고택에서 현령 소량(小良)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종17년(1435)에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형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는 매우 드문 예였다.

세종19년 집현전을 설치한 세종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서 강론을 담당할 문학에 밝은 선비 10인씩을 뽑게 하였는데, 형제가 거기에 선발됐다. 최고의 영예였다.



교지
실록을 보면, 그는 연소한 문신 가운데 장래를 총망받았던 대표적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18년(1436)에 임금이 어명으로 승정원에 이르기를, “봉상시 판관 이순지가 상시로 간의대에 근무하며 천문을 관측했는데 지금 어머니 상을 당했으니 여러 사람들이 이순지를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라”라 했다.

이에 승정원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집현전 정자(正字) 김담이 나이가 젊고 총명하고 민첩하여 영오하므로 그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고 천거했다. ‘총민영오(聰敏穎悟)하다’는 최고의 평을 받은 것이다.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충주목사가 되었을 때 정사를 확실히 하고 송사를 잘 다스렸다는 평을 받았다.

충주는 산악 지대로 도둑 출몰이 잦았다. 문절공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도적을 원수 보듯 하여 철저히 적발해 응징했다. 너무 가혹하다는 득담까지 들었다. 이 때문에 그 지역에는 도적들이 얼씬도 못했다 한다. 안동, 상주, 경주 고을 수령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했다.

문절공의 관직 이력을 보면 그 대부분이 외직에 치우쳐 있다. 특히 말년에 경주부윤 직에 오래 있었던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부모 봉양에 있었지만 실제 이유는 부당하게 왕위에 오른 세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시호 역시 글월 문(文) 자에 절개 절(節) 자로 내려졌다.

아이러니 하게도 문절공에 대한 세조의 예우는 남달랐다. 그는 하직하는 상주목사 김담에게 영친연(榮親宴)을 내렸다. 세조는 그에게 의복과 말 안장을 내려줌과 아울러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해 영친연을 베풀어주라고 했다. 영친연이란 출세한 자식이 어버이를 위로하는 잔치를 말한다.

단종을 지지한 단초는 왕조실록에 일부 드러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34년 뒤인 연산군4년(1498)에 유자광의 심문으로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이개, 박팽년, 하위지의 일에 대해 말했다.

“김담이 하위지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는 말을 진사 최익한에게 들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김담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에게 ‘위방불거(危邦不居)’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때 ‘위태로운 나라’라는 의미의 ‘위방’이란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조정을 지칭한 것이다. 결국 김담은 사육신처럼 정면으로 세조를 부정하지는 않았어도 외직을 전전하며 적극적으로 중앙무대에서 국왕을 위해 헌신하지는 않았다. 그가 선택한 외직은 자손을 보호하기 위한 고심에서 나온 최소한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의 속내를 짐작할 또 다른 단서가 있다. 그는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는데, 맏사위에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이란 이가 있다.

그는 도촌(桃村)이란 호를 가졌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영주와 이웃한 소백산 아래 봉화 사제(沙堤)마을로 내려와 평생을 북쪽으로 작은 창문 하나만 낸 집을 짓고 그 속에 거처하며 출입을 하지 않고 세상을 버린 이다.



묘소전경

그 집이 공북헌(拱北軒)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의 행적은 후일 그것이 북쪽 영월 땅에 유배갔던 단종을 기리는 것이었음이 알려져 최고의 찬사를 받았고 단종 절신(端宗節臣)으로 기려졌다. 장인과 사위를 일컫는 옹서(翁壻)란 말이 있는데, 두 옹서가 세조 치세에서 단종을 지지하는 마음을 남몰래 가졌던 것이다.

김담의 비중을 단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또 있다. 안견이 그린 불후의 명작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현재 일본 덴리대학에 소장)다. 그림 말미에 당대를 대표하는 문신들이 쓴 시들이 있다.

몽유도원도의 주인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이다. 21명의 세종조의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신숙주, 이개,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항, 백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 만우, 최수가 그들이다.

김담은 당당히 이들 기라성 같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과에서 성삼문이 1등, 김담이 2등, 이개가 3등이었던 것도 김담이 당시를 대표하는 일류였음을 알려주는 예다.

종손의 아파트에서 종손이 손수 정성껏 쓴 병풍서를 보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문절공이 몽유도원도에 쓴 시 작품이었다.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운 교감(交感)이다.

문절공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학자 한 사람이 있다. 이순지(李純之)이다. 그는 본관이 양성(陽城)으로 문절공보다 10년 연장자로 7년 앞선 세종9년(1427)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들은 특히 천문 분야에서 호흡을 맞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작업이 칠정산(七政算) 내외편(內外篇) 책자 편찬이었다. 칠정산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는 의미로 해와 달, 5개의 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알리는 것이다.

칠정산 내외편은 세종24년(1442)에 완성되었는데, 전문가들은 아랍의 천문학보다 앞선 동 시대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이 이러한 수준의 연구를 한 것이 1682년이라고 하니 우리보다는 240년이나 뒤의 일이었다.

조선 전기에 이처럼 정밀하게 연구했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만 하다. 이 점에 문절공의 위대함이 있다. 이순지와 김담은 평생을 천문 역법 연구에 바친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였다.

종가가 소장하고 있던 목판은 안동한국학진흥원에 위탁했고, 교지 등 고문서 자료는 영주의 소수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2006년 10월 2일부터 2007년 3월 말까지 소수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선성 김씨 문중 유물 특별전’이 개최된바 있다. 이때 주목된 작품이 정통12년(1447년, 세종 29) 김담(金淡) 친시(親試) 을과(乙科) 1등 제2인 급제자 교지였다. 지금부터 560여 년 전의 작품이다. 그리고 문절공이 손수 제작한 것으로 전해오는 천문도(天文圖) 한 장도 전시되었다.

다음호엔 청주 양씨(淸州楊氏) 윷?蓬萊) 양사언(楊士彦)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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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5/2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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