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판도라」. 1898년 작, 유화. 개인 소장.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판도라」. 1898년 작, 유화. 개인 소장.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왜 판도라에게 손재주만 내리고 지혜는 선물하지 않았을까. 인간에게, 아니 여자에게 지혜란 불필요한 사양(仕樣)이었을까. 아무튼 준비는 끝났다. 판도라가 지상으로 내려갈 날이 다가왔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주면서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건넨 상자에는 무엇이 들었는가. 신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나쁜 것은 모조리 쓸어 담았다. 굶주림, 가난, 노화, 질병, 고통, 절망, 슬픔, 원한, 복수심, 잔인성, 분노, 증오, 질투….

우리가 알다시피, 신화에서건 동화에서건 우화에서건 “절대 하지 말라.”는 경고는 곧 “반드시 하게 된다.”는 예고와 같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가 어떻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결과를 안다고 해서 태연할 수는 없다. 소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 관객처럼 우리도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운명을 훤히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지켜보며 2500년 전 그리스 원형극장에 모인 고대의 관객들과 ‘공포와 연민’을 공유하는 것이다. 판도라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 모두는 프로메테우스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판도라의 짝으로 에피메테우스를 점찍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것을 내다보는 자이기에, 제우스의 보복이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으리란 사실도 알았으리라. 그는 제우스가 내린 벌을 받으러 카우카소스 산으로 끌려가기 전에 동생에게 당부했다.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절대 받지 말라고. 당연한 일이지만,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아프로디테를 본떠 신의 솜씨로 빚어낸 판도라의 미모는 눈부셨다. 팜므 파탈. 형의 당부고 뭐고 따질 겨를도 없이 냉큼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처음에야 행복했겠지. 뜨겁고 황홀한 밤과 낮이 수없이 지나갔으리라. 그러나 이들에게도 정해진 수순처럼 권태기가 온다. 일상이 권태롭고 재미없어진 판도라는 문득 제우스가 준 상자를 생각해낸다. 제우스의 경고가 떠올랐지만 불길처럼 타오르는 호기심을 무슨 재주로 잠재운단 말인가. 기어이 상자는 열렸고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惡)이 쏟아져 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뚜껑을 닫았다. 그래서 거기 희망이 남았다. 이 일로 인간은 이전에 몰랐던 고통을 영원히 짊어졌다. 그럼에도 희망만은 버릴 수 없게 되었다.

판도라의 신화는 다른 버전이 하나 더 있다. 에피메테우스의 집에 원래 재앙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에게 항아리를 열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판도라는 기어이 항아리 뚜껑을 열어 버렸다. 판도라가 항아리 뚜껑을 여는 순간,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처지가 되었다. 죽도록 노동을 해야 했고,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열린 항아리 뚜껑은 아무도 되돌릴 수가 없다. 제우스는 이 광경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인간을 벌하기 위해 신이 여성을 창조했으며 여성이야말로 악과 고통의 근원이라는 신화는 여성 비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윤일권·김원익) 성경 속 아담과 이브의 경우처럼, 여자의 얄팍한 호기심이 결국 인간(즉 남성)을 낙원에서 쫓아내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이런 생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700년 무렵 보이오티아에 살면서 신들의 계보를 정리한 『신통기(神統記)』와 교훈시 「노동과 나날」을 남겼다.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서 여자들을 수벌에 비유한다. 일벌들이 뼈 빠지게 일해서 모은 양식을 벌집에 편안히 앉아 배 안에 쑤셔 넣기만 한다는 것이다. 「노동과 나날」에는 판도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까지 지상에 사는 인간의 종족들은/아무런 번민도 없었고, 괴로운 노동도 없었으며/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질병도 모르고 살았다./그런데 여자는 그 손으로 커다란 항아리 뚜껑을 열어/항아리의 내용물을 마구 흩어놓아/인간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초래하게 되었다./그곳에는 한 사람 엘피스(희망)만이/항아리 가장 밑바닥에 남아 있었다./ 구름을 모으는 힘과 아이기스(방패)를 가진/제우스의 계략으로/여자는 그것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항아리의 뚜껑을 닫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엄청난 다른 재앙들이/인간세계에 횡행하게 되었다.”

윤일권과 김원익이 함께 쓴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에서, 에덴동산의 ‘금지된 선악과’는 프로메테우스의 ‘금지된 불’과 같다. 선악과는 인식의 열매요 자각의 열매다. 동물처럼 본능에만 의존하던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변화시킨다. 불을 훔친 대가로 판도라의 상자에서 죄악이 쏟아져 나왔듯 선악과를 훔친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되어 죄악의 늪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인식과 자각의 힘은 인간에게 문명화와 낙원 추방이라는 상반된 길을 동시에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해석과는 별개로, 여자는 어찌하여 이토록 사악하며 저주받은 운명의 징표가 되어 버렸는가. 판도라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인류 추방의 악역을 온전히 짊어지게 되었는가. 그녀는 이브와 더불어 인간의 무의식에 갇혀 있다. 희망이 상자 속에 갇혀 있듯이. 우리는 말한다.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희망이 있기에 삶을 버리지 않고 살아낸다고.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유예되는 현실일 뿐이다. 희망은 영원히 희망으로만 남는다. 희망을 가둔 상자는 지금도 굳게 닫혔고,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했다. 상자를 여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이제 나의 이야기는 막바지를 향한다. 나는 청경우독에서 고전과 신화 속의 여성들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어쩌다’와 ‘왜’를 물으면서 인식의 지평선을 향해 여러분과 함께 출발했다. 대한민국은 가끔 여혐(女嫌)의 늪지처럼 가스를 뿜어낸다. 이 진창은 아직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의 심연과 같다. 아이러니! 그럼에도 나는 거기서 마라의 살덩이를 깊이까지 가르고 들어간 칼끝, 남성의 육체에 각인된 여성의 성기, 세상의 근원을 본다. 거기서 빠져나와 현실을 이야기하려면 다른 대지에 발을 디뎌야 한다.

그래도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았다. 판도라가 남겨 놓은 희망과 같이.

허진석 시인·한국체육대학교 교수


허진석 시인·한국체육대학교 교수 weeklyh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