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주저앉을 순 없었어요"

01/28(목) 19:03

서울 구로구 구로본동의 월드아파트는 우리 사회의 평범한 가장 180여명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또 다른 기념비다. 21층짜리 이 주상복합아파트는 시공회사의 부도와 부동산 사기, 그리고 대출을 거부하는 금융기관의 벽을 이겨낸 입주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완공한 피와 땀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27평형과 33평형 주택 189세대와 상가 144채가 포함된 1동짜리 이 아파트의 원래 명칭은 동진아파트였다. 94년초 서울시 동시분양공고를 보고 분양을 신청한 사람들은 대부분 몇년간 부어온 주택청약 통장을 쓰다듬으며 내집마련의 꿈을 키워오던 서민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분양이 확정된 입주자들은 대부분 모델하우스 한쪽 벽에 그려져 있던 아파트그림을 떠올리며 행복해했다.

입주자들의 행복은 그러나 1년을 넘기지 못했다. 94년 12월 시공사인 동진주택㈜이 1,000억원대의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대형업체는 아니지만 비교적 내실있는 회사로 알고 있었던 입주자들의 충격은 컸다. 게다가 20%에 불과한 공사진행률에 비해 중도금은 가구당 평균 6,000만원 이상을 납부한 상태였기 때문에 입주자들의 불안감은 커졌다. 1억~1억3,000만원인 분양금액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돈이었다.

입주자들을 서서히 휩싸오던 불안은 갑작스러운 현실로 나타났다. 믿었던 주택사업공제조합의 시공보증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 시공회사는 다른 건설회사 3곳의 보증만 내세우고 법적인 보증기관인 공제조합의 시공보증은 받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보증을 받지 못한 이유가 시공회사가 아파트 부지를 법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동진주택㈜은 해당 부지를 경기은행에 90억원에 근저당해놓고도 이를 숨긴채 토지관련 서류를 위조해 구로구청으로부터 건축승인을 받았다. 악덕 건설업체와 주의깊지 못한 공무원들이 200억원대의 아파트를 불법 건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불법건축물에 대출을 해주는 금융기관은 없었다. 추가 대출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은 입주자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저버리는 듯 했다. 구로구청이 관련자들을 형사고발했지만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회사 간부 몇명이 구속돼 사법처리됐지만 정작 회사 대표 백모(60)씨는 입주자들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100억원을 모두 날리고 미국으로 도피해 버렸다.

혼자였으면 절망끝으로 내달릴뻔했던 이 상황에서 입주자들은 힘을 합쳐 하나가 되기로 했다. 중도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못했던 2가구를 제외하고 187명의 입주자들이 ‘주민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내집 마련’의 꿈마저 부도낼 수 없다는 의지가 포기하자는 일부 의견을 압도했다. 물론 건축승인을 내준 구로구청과의 법정투쟁을 통해 시공사에 사기당한 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도 한 몫을 했다.

대책위는 우선 적절한 가격에 건축을 담당할 시공업체를 찾아야 했다. 1년이 넘는 시행착오 끝에 월드건설㈜과 계약을 맺었다. 공정률을 감안, 90여억원에 공사계약을 맺고 대금은 공사진행에 따라 지급하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96년 4월 드디어 공사가 재개됐다. 벅찬 마음으로 재개한 공사지만 공사가 진행되면서 입주자들은 더할 수 없는 분노를 느껴야 했다. 동진주택㈜이 처음부터 엉터리로 공사를 해놓은 상태여서 보수해야 할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 다행히 새 시공사인 월드건설㈜의 조규상회장이 하자보수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자청해 위기를 넘겼다. 조회장은 넘지 못할 산같았던 은행대출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줬다. 은행문을 수십차례 두들긴 끝에 시공사의 보증으로 주택은행으로부터 가구당 1,800만원 가량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시밭길은 끝나지 않았다. 입주에 가장 필수적인 토지 문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갔다. 구로구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한 것. 77억여원을 청구해놓은 입주자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승소해서 받은 돈으로 토지를 되찾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때마침 IMF체제로 온 나라가 비상상황에 접어들면서 입주자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해갔다. 토지 구입을 위해서는 추가 비용이 필요했지만 어느 누구도 돈을 마련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IMF체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 입주자들을 구원해줬다. 토지를 실제 소유하고 있던 경기은행이 지난해 11월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토지를 싼 값에 경매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입주자들은 마지막 남은 돈으로 경매에 참가해 20여억원에 토지를 경락받을 수 있었다. 아파트 건설까지 넘어야했던 너댓번의 고비가운데 가장 힘들었고, 동시에 가장 기적같은 순간이었다.

곧바로 토지등기를 완료하고 98년 마지막날 드디어 건물등기까지 마쳤다. 명실상부한 ‘집주인’이 된 입주자들은 등기부 등본을 각자 손에 쥐고 대부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주민대표 김영길(38)씨는 “모두가 해냈구나하는 생각에 가슴벅찬 기분을 느꼈다”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기쁨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소개했다.

주민들은 이 의견대로 지난 12일 구로구민회관에서 조촐한 월드아파트 준공식을 갖고 서로의 마음고생을 위로했다. 주민들이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작은 행사였지만 그 의미만큼은 작지 않았다. 주민들은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포기하려고 했지만 공사가 차츰 진행되면서 아파트가 제 모습을 갖춰가자 힘을 얻게 됐다”면서 “부도난 아파트 탓에 시름하고 있는 전국 2만여 가구에게 우리 아파트가 작은 희망의 상징이 됐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상연·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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