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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나를 비우고 서있는 세상

“밖으로 가니 안이 그립고/안으로 가니 밖이 그립고/안팎을 하나로 하겠다고/얼마나 덤볐던가/저 물빛은 안인지 밖인지/오늘 아침 얼음물에 빨래를 하는데 그 물빛이 어찌나 눈부시던지”(‘물빛’ 전문).

노동자 시인 백무산(44)의 최근 시집 ‘길은 광야의 것이다’는 이런 물빛으로 물들어 있다.

84년 ‘지옥선’으로 등단했을 때, 그때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핏발선 눈초리와 분노의 외침은 어느덧 선적 고요함으로 잦아들었나보다. 그때 그는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어촌 주민들의 생존조건을 고발한 이 작품에서 이렇게 외쳤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살자고 하는 짓인데/아름답던 작은 어촌 쇠말뚝을 박고… 가야 할 곳마다 철책을 둘러치고/비켜 비키란 말야/죽는 꼴들 첨 봐! 일들 하러 가지 못해!/앰뷸런스 달려가고/뒤따라 걸레조각에 감은/펄쩍펄쩍 튀는 팔 한짝 주워 들고/싸이렌소리 따라 뛰어가고 그래도/아직도 파도는 시멘트 바닥 아래서 숨죽여 울고…”

그랬다. 투옥과 분신이 반복되던 80년대 그는 김남주, 박노해 시인과 함께 ‘유격적 감수성’으로 시대와 현실에 온몸으로 육탄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후 강산은 달라지고 시절도 변했다. 혁명과 변혁에 대한 한켠의 열정마저 식은 재처럼 사그라지고 너나 할 것없이 새 밀레니엄(천년)을 떠들어댄다. 시인은 그런 변화에 어쩔 줄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 집을 지어놓고 이걸 내 집이라고 하고/이걸 사는 것이라 하고 태연하게 사는 사람이/나는 정말 부러웠다/바람도 없이 나는/왜 이리 출렁거리는가…”(‘출렁거리는 사람’중에서)라고 읊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 특유의 현실감각이 무뎌진 것 같지는 않다. ‘밥 먹고 보자’에서는 다시 이렇게 외친다. “…저기 내 동포, 죄없이 굶고 우는 내 핏줄/밥은 먹어야지 밥은 먹여야지… 밥도 못되는 사상보다/남은 밥도 줄 줄 모르는 사상이 먼저 무너져야 한다/밥 먹고 보자/밥 먹이고 보자”.

지금쯤 그가 시를 통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시인의 후기는 그 실마리를 빠끔히 드러낸다. “삶을 비우고 길을 비우고 존재를 비우고 나면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길이 아니라 광야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가 무엇을 만들고 세우고 굳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 허물고 기울고 흔들리게 하고 비워내게 하는 것이라고 이제사 나는 믿는다. 그 대상은 무엇보다 ‘나’라는 아만(자신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번뇌)과 ‘권력’이라는 폭력과 소외와 억압의 기제일 것이다.”

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지음/창작과비평사/5,000원(6.2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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