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 '더 깊은 뜻' 있을까

02/02(화) 17:37

허주(虛舟)는 ‘왕따’?

‘영남_보수 신당 창당 가능성’ 발언(1월28일) 이후 허주(한나라당 김윤환전 부총재의 아호)가 곤궁한 처지에 몰리고 있다. 우선 허주의 지역기반인 대구·경북(TK)지역 의원들부터 대단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신당창당은 죽는 길’ 이란 극언에서부터 ‘민심을 모르는 소리’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 이란 현실적 재단에 이르기까지 부정일색이다.

여기에 이회창 총재를 비롯한 주류는 때를 만난 듯 일제히 공격의 칼날을 허주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이총재는 허주의 기자 간담회 발언이 있었던 시각 여의도 한 음식점으로 TK의원들을 불러 구미 장외 집회 계획을 확정하는 등 허주를 코너로 밀어붙였다. 이총재는 또 허주를 정치적 보스로 모셨던 신경식사무총장의 입을 통해 ‘매당(賣黨)론’ ‘사쿠라론’ 을 펴며 “국민들은 신당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을 단칼에 날려버릴 것” 이라고 난도질했다.

◆“입지확대 노린 언론플레이” 곱지않은 시선

게다가 여권의 반응도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 국민회의 한화갑총무의 ‘여권과 TK지역간 정치연합’(1월27일) 발언에 대해 ‘TK의 지역정서와 부산·경남지역 및 민주계를 감안하지 못한 비현실적 언사’ 란 내부비판이 적지 않던 터에 허주의 발언까지 연이어 터져 나왔으니 그럴만도 했다. 한총무와 허주의 잇단 발언이 가뜩이나 뒤틀려 있는 영남 정서를 한층 들쑤셔 놓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여권일각에는 “비리혐의와 당내 입지 약화 등으로 곤경에 처한 허주가 정치적 입지 확대를 노리고 마치 한총무와 상호교감이 있는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했다” 는 눈흘김까지 있었다.

3김 다음가는 정치 고수라는 허주가 어쩌다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됐을까? 특유의 정치감각이 무뎌진 것일까? 측근들의 말을 들어보면 당초 허주는 ‘신당창당’ 카드를 꺼내기 위해 기자간담회를 자청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회창 총재가 자신의 지역구인 구미에서 장외집회를 강행하자 열을 받아 ‘언론동지들’ 을 보자고 했던 것인데, 문답이 오가다보니 그만 너무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허주의 발언 내용을 곰곰이 뜯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그는 현재의 정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TK지역의 정서에 대해선 상당히 객관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대구·경북지역의 반 DJ정서는 매우 깊다. 대구·경북지역이 국민회의 또는 자민련에 흡수된다거나 이 지역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여당에 가는 것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독자적인 야당을 해서 여야 협력관계로 간다면 모를까, 여당 발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는 게 TK지역 사람들의 생각이다” 고 말했다.

◆타이밍 못 맞추었지만 ‘준비된 발언’

‘신당발언’ 은 그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아직 여권이 말하는 정계개편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 그것이 실현되려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분명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방법과 시기도 맞아 떨어져야 한다. 정계개편이 이루어지려면 야당 내에서 강력하고 독자적으로 해야지, 여권이 주도하고 야당이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신당을 만들어봐야) 사쿠라 정당 밖에 더 되겠는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 특정 정책에 대한 협의를 통해 연합해 나가는 것이 우리와 같은 지역구도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정계개편 방안이다. 만일 신당을 창당한다면 영남세력과 보수세력이 독자 세력화해서 건전한 야당을 만드는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허주의 신당론은 물론 “이회창 체제로는 안된다” 는 전제를 깔고 있다. “현재 한나라당은 대구·경북지역과 보수세력보다는 개혁세력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정당이 정치적으로 정체성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겠느냐” 는 것이다. 허주는 그러면서 “지금과 같은 이총재의 정치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나라당이 건전 야당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 지도체제를 개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고 덧붙였다. 당장 자신의 신당구상을 실천에 옮기기보다는 집단지도체제 등을 통해 당 체제를 바꾸는 일부터 추진할 수 있다는 뉘앙스였다.

그의 신당론은 대단히 잘 정리돼 있을 뿐 아니라 따로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명한 논리구조를 갖추고 있다. ‘준비된 발언’ 임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정작 문제는 발언시점과 구상의 실현가능성 여부다. 시점에 대해선 평소의 그답지 않게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는 게 분석통들의 중평이다.

◆정계개편의 주요변수로 작용할 듯

한총무의 발언에 대한 ‘화답’ 으로 신당 카드를 던진 것이라면 여권에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겨 전후 좌우를 충분히 가리지 못한 채 악수를 둔 것이고, 이총재의 구미집회 강행에 대한 빗장 걸기 차원이었다면 TK의원들의 분위기가 이미 집회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만큼 아무런 실효없이 역작용만 초래하는 꼴이 됐다는 것이다.

실현 가능성 부분은 좀더 새겨볼 필요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다는 아니라는 얘기다. 한나라당 비주류의 한 핵심중진 의원은 이와관련, “TK에만 시선을 고정시키지 말라. 구 민정계는 TK뿐 아니라 부산·경남에도 있다. 영남권 전체에서 10여명이 신당에 동참하고, 이한동의원이 수도권에서 깃발을 들게 되면, 10명 정도의 추가동참은 너끈하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의원 20명 이상)만 갖추면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될 것이다” 며 시각교정을 요청했다. 그는 또 “TK의원들 입장에선 현 상황에서 신당론에 공감을 표하는 것 자체가 자해행위에 다름 아닌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시기가 무르익으면 감은 떨어지게 돼 있다” 며 물밑 작업 진척도가 간단찮음을 시사했다.

어쨌거나 허주는 새로운 정치실험의 주사위를 던졌고, 복잡다단하게 진행될 2월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선택은 정계개편의 주요 변수중 하나가 될 것 같다.

홍희곤·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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