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고대 한국은 '포경 선진국'

07/21(수) 16:55

울산 울주군 반구대의 암각화. 70년대 초반 학계의 시야에 들어온 이 암각화는 우리민족과 고래의 인연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그려진 이 그림에는 고래가 한마리도 아니고 자그만치 10여마리나 새겨져 있다. 이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두줄기로 숨을 내뿜고 있는 큰 고래. 바로 긴수염고래다. 큰 것은 길이 30㎙에 중량만 45톤에 이른다. 고래중에서 숨을 두줄기로 내뿜는 것은 긴수염고래 뿐이다.

그림에는 고래만 있는 게 아니다. 고래잡이하는 사람과 배가 있고 작살도 그려져 있다. 20여명이 노를 젓고 있고 한편에는 작살에 꽂힌채 도망하는 긴수염고래가 있다. 영화 ‘모비딕(백경)’이 연상된다. ‘미국식 포경’ 방법이다. 미국식 포경은 영화 백경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300~400톤 되는 모선에 5~6척의 보트를 싣고 항해하다 고래를 발견하면 작살과 밧줄로 무장한 보트를 내린다. 고래에 작살을 꽂고 힘이 빠져 죽을 때까지 보트로 따라간다. 미국식 포경의 표적은 죽어도 가라앉지 않는 대형고래. 긴수염고래 등은 몸에 기름이 많아 죽어도 물위에 뜬다고 한다.

반구대 암각화로 드러난 고래와의 인연

암각화에 나타난 고래잡이 모습은 세가지를 말해준다. 우선 우리민족이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에 나섰다는 것.

또하나는 포경기술 수준. ‘고래박사’로 통하는 박구병 부경대명예교수(경제사전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반구대 암각화야 말로 우리민족이 선사시대부터 선진적 포경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생생한 증거다. 서구에서도 근대에 와서야 개발된 미국식 포경법이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포경 선진국인 노르웨이의 고대 포경그림에도 돌고래 같은 작은 고래만 나타나 있다. 이에 비해 반구대 암각화에는 대형고래가 포획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림이다. 사냥모습도 모습이려니와 고래종류도 여러가지다. 이 그림은 고대 우리민족이 원시포경으로서는 매우 발달한 형태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는 긴수염 고래가 한국 연근해, 특히 동해안에 옛부터 많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이 덕분에 우리나라 바다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양 포경국가의 침탈대상이 된다.

자원침탈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민족과 고래의 인연에 대해 잠시 덧붙이자. 선사시대의 발달한 포경에도 불구하고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고래는 우리민족과 잠시 멀어진다. 삼국시대 고구려 문헌에 한두번 고래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고구려 민중왕 당시 ‘왕에게 고래 눈을 바쳤는데 고래눈에서 불빛이 났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인들이 고래고기를 구하러 한반도에 왔다’는 얘기가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고래가 떠내려 와 고래기름을 채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어쨋든 조선시대 말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에서 계획적·상업적 포경은 없었다는 게 통설. 박교수는 포경이 중단된 이유에 대해 “농업의 발달로 안정적인 식량수급이 가능해지면서 포경이 쇠퇴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한반도 포경사는 자원침탈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포경이 시작된 것은 1848년 미국 포경선이 동해에 출현하면서부터. 이후 한해 120여척이 동해에서 주로 긴수염 고래를 잡았다. 이중에는 프랑스와 독일 포경선도 몇척씩 끼여 있었다. 미국 포경선단은 1880년까지 32년간 동해에서 거의 고래의 씨를 말렸다는 것이 박교수의 설명이다. 나아가 19세기말까지 극동해역에서 긴수염고래의 멸종위기를 부른 것도 미국어선의 남획 때문이라고 한다.

한반도 연근해의 근대 포경사는 식민지 자원침탈 과정이 육지 뿐 아니라 바다에서도 똑같이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바통을 이어받은 나라는 러시아. 러시아는 동해에서 포경을 위해 1889년 3월 당시 조선정부와 포경기지 조차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장생포와 북한지역의 장전항, 마양도가 러시아 포경선의 전진기지가 됐다.

당시 러시아가 사용한 포경법은 미국식과 구별되는 ‘노르웨이식’. 선수에 장착된 포를 쏘아 고래를 맞혀 잡는 방식이다. 노르웨이식은 미국식과 달리 죽은뒤 물위에 뜨는 고래 뿐 아니라 가라앉는 고래도 잡을 수 있다. 당연히 여기에 걸리면 큰고래, 작은고래 할 것 없이 모조리 밥이 된다. 종류에 관계없이 씨가 마르게 되는 것이다.

일본도 1900년 노르웨이식 포경법을 채용하면서 뒤늦게 동해지역의 포경에 가세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면서 ‘포경전쟁’이 한반도 연근해에서 벌어지게 된다. 일본은 러시아 포경선이 군함을 대신해 해양관측에 나서자 크게 긴장, 러시아 포경선을 나포해 러일전쟁의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종식되면서 일본은 동해에서의 상업적 포경을 독식하게 됐다.

석유사용전 고래기름은 고급화력자원

열강들이 19세기 포경에 열을 올린 것은 고래의 산업자원적 가치때문. 석유사용이 본격화하기 이전 고래기름은 현재의 석유나 다름없는 고급 화력자원이었다. 산업용, 조명용, 마가린 제조 등 식용, 장식·화장품 제조용으로 널리 쓰였다.

과거 공업화에 뒤졌던 한국으로서는 열강이 우리바다를 유린하는 동안 두눈 뻔히 뜬채 당하고만 있었던 셈이다. 고래의 산업적 중요성에 눈을 뜨지 못한 것도 당연한 결과. 박교수는 “국민들이 조선말 열강에 의한 금광 채굴권 등 육상의 이권침탈은 기억하면서도 해상이권 침탈에는 무관심한 것도 이같은 배경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상업적 포경에 나선 것은 65년 전후. 65년부터 85년까지 20년간 약 1만5,000마리를 잡아 식용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일본에 수출도 했다. 한반도 연근해 해역은 과거 고래천국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97년 한해동안 밍크고래 170마리가 그물에 걸려 잡혔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뒤늦게 되찾은 고래와의 인연도 86년 미국주도의 국제포경위원회(IWC)가 전면적 포경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하면서 또다시 멀어졌다. 그러나 70~80년대 대중가요 ‘고래사냥’이 유행했던 것은 ‘고래 힘줄처럼’ 옛부터 우리민족이 고래와 맺었던 질긴 인연 탓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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