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황제를 키운다] '임신'순간부터 '교육'은 시작된다

08/10(화) 14:44

IMF가 한창이던 지난해 여름, 만 3세의 여아 하나를 둔 주부 A씨(29·서울 강서구 방화동)는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옆집에 놀러갔다가 난처한 일을 겪었다. 그집에 사는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가 손톱으로 자기 아이의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낸 것. 어린이 동화 그림책과 놀이구를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하다 다툼이 난 것이다. A씨는 다른 집을 찾아 갔다가 황당하게도 같은 일을 다시 당했다. 그 집에도 똑같은 유아용 교재·교구 세트가 있었던 것. A씨는 같은 층의 유아가 있는 7가구 중 6가구가 벌써 이 전집을 구입했고 그중 일부는 임신하자마자 태아 교육을 위해 그 세트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날로 A씨는 ‘우리 얘만 괜히 뒤처지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남편을 설득, 문제의 그 유아 교재·교구 일부를 구입키로 결심했다.

그러나 A씨는 동화 그림책은 물론 CD, 비디오, 목각 놀이감, 퍼즐, 그림맞추기 등 다양한 영·유아 교재 교구를 포함한 이 세트를 모두 구입할 경우 최고 1,000만원이 넘는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하는수 없이 A씨는 남편의 봉급이 대폭 깎이는 등 가계부담이 만만치 않았지만 교재의 일부만을 선택, 300만원 어치를 할부로 구입했다.

신세대 부모들의 조기교육 열풍

연간 1조8,000억원대로 추정되는 영·유아와 아동교육시장은 아동용품과 함께 해마다 높은 성장율을 자랑하는 유망업종으로 자리잡았다. 최근에는 ‘교육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때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광고와 함께 태아를 가진 신세대 부부를 겨냥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까지 늘어나고 있다.

만 2~4세의 영·유아 교육은 80년대말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분야다. 일반적으로 5~7세때부터 하나둘씩 교육을 시작했고 그것도 유아원에서 한글깨우치기나 기껏해야 태권도장, 음악·미술 학원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핵가족화가 더욱 가속화하면서 자녀 교육은 신세대 가정에서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IMF여파로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4~5년전부터는 조기 영재 교육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새로운 교육 테마로 자리잡은 것이다.

90년대초 태동한 국내 유아·아동 교육은 가장 초보적 단계인 학습지에서부터 출발했다. 당시만 해도 단순히 정답고르기, 그림그리기 등 극히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다 가정교사 방문 지도 방식이 새로 도입됐다. 수십만원에 이르는 교재를 구입한 뒤 매달 일정액을 지불하며 가정 교사를 초빙, 반복 학습해 나가는 방식이다.

방문 학습지 시장을 개척한 국내 토종 학습교재사인 대교의 ‘눈높이 학습’을 비롯해 재능교육의 ‘스스로 학습법’, 공문교육연구원의 ‘구몬학습’, 웅진출판의 ‘웅진 씽크빅’등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들 ‘빅4’는 전체 학습지 회원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외에도 ‘영재시리즈’를 낸 영교, ‘빨간펜’의 교원, ‘A+한글마을’의 중앙교육문화사 등 후발 주자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 현재 전국의 학습지 회원은 대략 50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학습지 난립, 실효성엔 의문

그러나 이런 방문식 학습지는 대부분 간접 체험식, 흑백논리식의 구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돼 왔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장명림연구원(유아교육담당)은 “영·유아 교육이 이전에 비해 내용이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 주입식, 암기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조기교육은 오감(청각·시각·후각·미각·촉각)을 통한 직접교육과 ‘생각할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인지촉진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연구원은 “특히 자녀 교육은 우선 이들 자녀에게 알맞는 교육프로그램을 선택할수 있는 부모의 능력이 중요하다”며 “앞으로 자녀교육의 초점은 부모교육이 우선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감을 통한 체험적인 유아교육 방법은 10여년전부터 국내에 도입됐지만 엄청난 비용 때문에 일부 계층에 국한돼 왔다.

대표적인 영·유아 학습 교재로는 ‘프뢰벨’과 ‘한국몬테소리’를 들 수 있다. 세계적인 유아 교육 대가들의 교육 이념에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해 제작된 이 교재는 단순한 동화책만이 아니라 ‘보고, 만지고, 느끼고, 손수 만들어가는’ 다양한 놀이기구와 책으로 구성돼 영·유아와 미취학 아동을 둔 부모들에겐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수백만원에서 최고 1,000여만원에 이르는 고가여서 일부 상류층 가정에 제한돼 왔다. 그러다 90년대 중반부터 영재 교육붐이 일면서 중산층에까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IMF 한파로 계몽사, 고려원, 삼성출판사 등 굴지의 출판사들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이 회사들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지나치면 영재를 둔재로 만들 수도

하지만 이같은 부모들의 조기 영재 교육 붐은 적잖은 문제를 낳았다. IMF로 많이 정리가 됐지만 지난해까지 서울과 수도권 일원에서 사설 영재학원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했다. 이 학원들은 검증받지 않은 영재 판별 텍스트를 가지고 섣부른 영재 교육을 실시, 자칫 ‘영재를 둔재’로 전락시킬 위험성마저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 학원들은 운영 방식은 먼저 영재 여부를 가리는 테스트를 한뒤 영재로 판명된 아이만 영재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런 뒤 테스트생 대부분을 영재로 판정, 이에 혹한 부모들에게 고가의 학원비를 요구하며 교육을 받도록 한다. 한마디로 ‘우리 아이는 남들과 다를 것이다’라는 부모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현재 세계적인 유아 교육의 흐름은 영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 국립영재교육원소장인 조지 풀 랜줄리(코네티컷대 교수)박사는 최근 국내 강연에서 “‘전체의 1%만이 영재’라는 기존의 영재 개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영재는 이제 전체의 15~20%까지 될수 있다는 광의의 개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부로부터 위탁받아 영재판별업무를 하고 있는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석희박사(교육심리학)는 “정부로부터 조기 유학을 원하는 아이들의 영재 여부를 의뢰받고 있지만 사실 누구를 영재로, 누구를 평범한 아이로 판정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나이에 비해 두뇌가 뛰어난 아이가 있지만 영재성은 단지 아이큐 수치가 높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개개인마다 타고난 능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한다”고 지적했다.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은 오히려 영재를 범재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송영웅·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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