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흑백사진으로 남은 추억의 프로레슬링

08/31(화) 15:14

전차가 종로통을 관통하고 강남 번화가가 논밭이었던 60년대. 당시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는 주말이면 흑백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몰려드는 동네 사람들로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천규덕의 당수는 일품이야”, “그래도 자이언트 바바의 16문킥은 조심해야 돼”, “야, ‘탄환’여건부는 왜 안나오는 거야”, “약삭 빠른 이노키도 김일의 박치기 한방이면 끝내줄 텐데…”.

아직 근대화가 이뤄지지 않아 보릿고개와 싸워야했던 그 시절, 일본과 서양의 거구들을 통쾌하게 바닥에 내리꽂는 프로레슬링은 온 국민의 응어리졌던 한과 설움을 풀어내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하나뿐이었던 경기장인 장충체육관 앞에는 신당동 4거리까지 줄을 이은 행렬로 끝이 없었고 레슬링 선수들은 국민적 영웅으로까지 추앙되기도 했다.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닌 전국민을 하나로 묶는 행사이자 잔치였던 것이다.

50년대 중반 부산서 시작, 엄청난 인기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국내 프로레슬링에서 그 화려했던 옛 명성의 흔적을 찾아 보긴 힘들다.

서울 영등포구 모 예식장의 10층짜리 주차타워 옥상 뒷편. 녹이 쓴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 몇개가 어설프게 놓여있고 그 옆에 먼지 때가 흠뻑 묻어있는 4각의 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위에서 육덕이 엄청난 두명의 레슬러가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을 하고 있다. 옆에 있는 5평 남짓한 사무실 벽에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신화인 역도산(본명 김신낙·1924년생)과 김일이 함께 포즈를 취한 오래된 대형 흑백 사진과 트로피들이 가득차 있다. 바로 이곳이 프로레슬링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국내 유일의 프로모션이자 레슬러들의 보금자리인 한국프로레슬링연맹(대표 이왕표)의 모습이다.

국내에 프로레슬링이 처음 선보인 것은 6·25의 전화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7년 무렵. 당시 아마추어 레슬링, 당수도, 복싱을 하던 선수들이 프로레슬러로 전향, 부산을 주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국내 챔피언은 플라잉 시저스가 특기인 장영철. 이밖에 당수도 출신인 천규덕, ‘타이거’ 안명길(현 국제심판), ‘백곰’ 우기환, ‘고릴라’ 이석윤 등이 강자로 자리했다. 국민적인 인기는 대단했지만 가끔 외국의 2류급 선수를 초청하는 것을 대단한 일로 여겼을 만큼 실력은 그리 높지 못했다.

김일 등장으로 일대 전환기

그러다 64년 ‘박치기 왕’ 김일이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국내 프로레슬링은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 역도산의 수제자인 김일은 63년 미국에서 WWA 헤비급 태그매치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등 역도산을 이어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선수. 그러나 63년말 밀항한 자신의 일본 신원보증인이었던 역도산이 한 청년의 칼에 살해되자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에서 경기를 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때 김일의 열성 팬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김일의 귀국을 추진, 7년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된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이후 문화재 관리국 산하에 있던 비원에 체육관과 합숙소를 마련해 주는 등 김일의 최고 후원자로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높을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던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65년 ‘장충체육관 사건’을 전기로 차츰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된다.

그해 여름은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데모가 한창이었던 시기로 야당의 불참속에 한·일협정비준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돼 시국이 평탄치 않았다. 그해 11월25일부터 장충체육관에서는 4일간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마지막날 경기가 진행되던 도중 일본 오쿠마가 한국 장영철에게 새우꺾기 공격을 시도하는 도중 장영철의 후배들이 갑자기 링으로 올라가 오쿠마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리치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장영철은 곧바로 장내 아나운서의 마이크를 빼앗은 뒤 돌연 “김일, 김일 선수에게 도전하겠습니다”고 외쳐댔다. 장영철은 또 “이대회 프로모터인 김일이 오쿠마를 사주해 척추를 부러뜨려 나를 불구자로 만들어 매장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레슬링은 쇼다” 폭탄선언, 사양길로

이로 인해 김일은 국내 프로레슬링계를 완전 평정하게 됐고 장영철은 레슬링계를 떠나게 됐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은 ‘레슬링은 쇼’라는 논쟁을 불러 있으켜 결과적으로 프로레슬링이 국민의 관심으로부터 서서히 사라지게 만드는 단초가 됐다.

김일은 당시 이 사건에 대해 “오쿠마는 에이스가 아니었다. 나도 장영철이 그에게 당할줄 어떻게 알았겠느냐. 질 것 같으면 항복을 하면 되는데 장영철이 안질려고 버티다 안되니까 후배들을 불러 행패를 부린 것이다. 실력없으면 지는 것이고 실력 있으면 이기는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한 프로레슬링은 80년대초 프로야구, 프로축구 등 구기 종목의 잇단 프로화에 밀려 서서히 팬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현재 국내 프로레슬러의 숫자는 불과 40~50명 정도. 이들중 레슬링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선수는 10명 안팎이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자영업을 하면서 아르바이트 삼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한프로레슬링협회 염덕영 사무총장은 “국내 프로레슬링은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은데 반해 제반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해 안타깝다”며 “미국의 WWF가 TV의 힘을 등에 업고 성공했듯이 우리도 언론이 밀어줘야 살 수 있다. 젊은 스타 선수들을 링에 세우기 위해선 자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지방흥행으로 명맥유지

80년대 신군부에 김일체육관(현 문화체육관)을 빼앗기는 등 고사 직전에 몰렸던 국내 프로레슬링은 90년대 들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해 현재 연간 30~40회의 대회가 지방을 순회하며 벌어지고 있다. 한 대회당 관중은 1,000~2,000명으로 일반인들의 생각보다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프로레슬러들은 “수입은 일반 봉급쟁이들 보다는 많은 편”이라고 스스로 밝힌다. 이들의 주 수입원은 1인당 일반석 1만원(어린이 5,000원), 특석 2만원하는 대회 입장 수입과 개인 스폰서들이 지원해 주는 후원금이 대부분이다. 이밖에 이들 중 인기스타 한두명은 영화나 TV, 광고 CF 등에 간간이 출연해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이제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 버린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프로레슬링계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시절은 가고 이제 변두리 한 주차빌딩의 옥상으로까지 밀려난 국내 프로레슬링. 한때 권력의 비호 아래 순풍을 타던 시기, 내부 분열로 자생력을 키우지 못했던 아픈 상흔이 프로레슬링의 슬픈 오늘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송영웅·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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