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이대로 좋은가] 선진국에선 꿈같은 얘기

08/05(목) 11:02

한화갑 국민회의 사무총장은 최근 외신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YS가 아들 때문에 저러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김현철을 사면시켜 줘야 겠다”고 말했다. 정치 재개에 나선 YS의 심기를 달래면서 예봉을 꺾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사면은 정치적으로 남용되거나 당리당략 차원에서 행사할 수 없다’는 헌법 내재적 한계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태다. 법치주의 선진국에서 이같은 정략적 사면은 찾아 볼 수 없다.

해외 각국에서도 사면제도 자체는 모두 인정되고 있지만 사면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으로 행사된다. 아울러 자의적인 사면권 행사를 통제하기 위해 제도적인 장치를 두고 있다. 군주의 고유권한에 속했던 서양의 사면제도는 민권강화와 정치제도의 민주화에 따라 ‘원칙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인정돼 왔다.

18세기 근대 형법학의 기초를 닦은 이탈리아의 체자레 베카리아는 “주권자는 사면권을 행사함으로써 법률을 암묵적으로 부인하게 된다. 군주의 사면권 행사는 불벌(不罰)이라는 공적 칙령을 만들어 내는 결과가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사면권은 불합리한 법률과 잔인한 형벌로 인해 사면이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경우에만 행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도 이같은 법정신을 바탕으로 사면의 한계를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사면권의 행사는 법률의 획일성, 경직성, 또는 수사과정에서의 오류를 시정하고 사후에 발생한 일반적·개별적인 사정 변경을 고려해야 할 경우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면권은 법적 평등이나 법적 안정성을 존중하는 토대 위에서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은 남북전쟁 종전 후 남부의 연방주의자들에 대한 일반사면을 단행한 적이 있다. 1865년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미국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모든 남부연합 지지자에 대해 전면적인 사면을 허용하는 포고를 발했다. 국가 대화합 차원에서 국민 대다수가 지지하는 정치적 절차를 통하되 조건을 붙여 행사한 것이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그러나 사면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공직참여나 전문직업, 특정 회사에 대한 취업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 처벌을 면하거나 감하는 혜택을 입었다고 해서 범죄사실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사면이 정치적 재기의 명분으로 탈바꿈하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셈이다.

독일의 경우는 국가전복과 반역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사면된 뒤 다시 얼굴을 내미는 12·12 쿠데타 주동세력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통독후 전개된 구동독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과 행형과정은 사면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베를린 장벽 탈주자 사살명령과 관련해 유죄선고를 받고 복역중인 전 동독 국방장관 하인츠 케슬러(79)는 서베를린 하켄펠데 감옥에서 조용히 형기를 채우고 있다. 아무런 특권없이 매월 60시간의 산보시간만 허용된 채 잡범들과 한 방을 쓰고 있다.

구동독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에곤 크렌츠(62)와 전 동베를린 공산당 서기 귄터 샤보브스키(70), 구동독 당경제 전문가 귄터 클라이버(67)도 97년 8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동독 탈주자에 대한 사살명령의 계선상에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록 이들은 냉전청산이란 명분 아래 사면을 받긴 했지만 정치·사회적 재기는 꿈도 못꾼다.

94년 망명지 칠레에서 81세로 사망한 구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도 마찬가지다. 동독이 흡수통일된 뒤인 90년 12월 체포장이 발부되자 구소련으로 피신했다가 92년 7월 독일로 강제송환돼 법정에 섰다. 재판중 지병인 간암이 악화해 칠레로 망명했으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 오지는 못했다.

거산(巨山)의 아들 소산(小山)과 가신이었던 홍인길씨는 최근 광복절 사면움직임이 있자 항소를 포기했다.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는 사면할 수 없는 법조항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김현철씨와 홍씨가 예상대로 사면될 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인상은 지울 수 없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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