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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위 어디로 가나] 금감위는 외유내강?

97년 이전만 해도 말 그대로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은행’임을 자부하던 제일은행. 정부의 금융 구조조정으로 99년 1월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 새로운 리딩뱅크로 부상한 한빛은행.

한국의 내로라하는 두 은행들은 요즘 모든 안테나를 여의도쪽에 맞춰 놓고 있다. 여의도의 옛 증권감독원 건물을 사용중인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청와대와 시중은행 본점이 몰려 있는 서울 시내로 청사를 옮길 방침을 검토하면서 자연스레 제일은행과 한빛은행(신축 본점) 본점이 후보지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금감위가 낙점하면 졸지에 본점을 내주고 다른 곳으로 쫓겨가야 하므로 두 은행의 ‘본점 지키기 경쟁’은 풍수지리설까지 거론될 정도로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한빛은행은 “조선시대 양반들을 감찰하던 의금부 자리였던 제일은행 본점이 금감위의 이미지와 어울린다”며 제일은행을 적격후보로 추천하는 반면 제일은행은 “남산 기슭에 지은 신축 본점을 내주기 싫은 한빛은행의 마타도어”라고 맞서고 있다.

재계엔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존재

본점을 사수하려는 두 은행의 경쟁은 한낱 금융권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국내 금융권에서 금감위가 갖고 있는 파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요컨대 금감위는 말 한마디만으로 시중은행들이 ‘살고 있는 집’을 접수할 수 있을 만큼의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금감위를 무서워하기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재벌개혁을 주거래 은행을 통해 진행하면서 일반 기업은 물론 5대그룹 역시 금감위의 말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실제로 재계에서는 “금감위는 저승사자 보다도 무서운 존재이며, 이헌재 금감위원장과 재계 총수의 면담이 이뤄질 경우 그 약속시간은 ‘금감위에서 정해준 시간’”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이다.

그렇다면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금감위의 위엄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금감위의 위엄은 국내용일 뿐이다. 국내에서 영업하는 외국기업이나 혹은 영업을 개시하려는 외국자본에게 금감위는 오히려 ‘협박 대상자’일 뿐이다.

실제로 금감위는 자신들이 미국의 정체모를 투자펀드라고 주장한 파나콤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 금감위에 따르면 파나콤은 8월26일 대한생명 구조조정 작업의 실무책임자인 구조개혁기획단의 이종구 심의관과 정채웅 과장에게 협박편지를 보냈다.

파나콤은 편지에서 “당신(이종구 심의관)과 정과장이 최근 법원에서 ‘파나콤이 금감위에 제출한 투자제안서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여러명의 미국 의회 의원들에게 돈을 지불했다’고 비난했으나, 이는 거짓일뿐만 아니라 워싱턴에 큰 분노와 경악을 불러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파나콤은 현재 대한생명 이사인 수 고시(Sue Gosh)씨의 명의로 된 서한에서 “이같은 진술은 파나콤의 평판을 손상시킴은 물론 미국 의회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이라며 “파나콤은 당신과 정과장의 모든 공식발표를 주목, 그 내용이 거짓되고 명예를 손상시킬 경우 개인적으로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는 등 민·형사상의 처벌을 법정에 요청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금감위는 이에 대해 “이 심의관과 정 과장은 법원에 결코 파나콤이 미국 의원들에게 돈을 지불했다고 밝힌 적이 없으며, 이는 정부를 헐뜯기 위한 파나콤의 날조”라고 밝혔다.

외국자본 협박엔 속수무책

미국 자본의 금감위에 대한 협박은 파나콤이 처음이 아니다. 제일은행 매각협상을 벌이고 있는 뉴브리지캐피탈 역시 7월말 “금감위가 제일은행 협상을 꼬이게 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내용의 협박서한을 정부에 보냈다.

뉴브리지캐피탈은 정부 고위관계자에게 보낸 문건에서 “제일은행 매각협상이 사실상 결렬단계(near collapse)에 있다”며 “협상이 결렬될 경우 김대중 대통령이 곤혹스런 처지에 놓이는 것은 물론 한국 정부의 구조조정 노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브리지캐피탈은 또 “협상이 결렬될 경우 7월2일 방미때 금융개혁의 상징으로 제일은행의 성공적 매각을 설명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 미 의회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도 손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은행이나 기업에 대해 고압적이기만 한 금감위이지만 파나콤과 뉴브리지캐피탈의 협박에 대한 금감위의 대응은 너무 대조적이다. 뉴브리지캐피탈과는 제일은행 매각협상을 계속 진행하고 있으며, 대한생명을 둘러싼 파나콤과의 신경전에서도 수세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금융계의 지존(至尊)’인 금감위가 외국자본에게 힘없이 밀리는 형국이 벌어지는 것은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외국자본의 삐뚤어진 행태에도 이유가 있지만 금감위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힘없는 국내기관들이야 금감위의 잘못된 지시에 묵묵하게 따르지만 외국인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금감위는 실제로는 협상이 타결되지 않았는데도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를 앞둔 7월1일 “뉴브리지캐피탈과의 협상이 타결됐다”고 서둘러 발표해 뉴브리지캐피탈에게 약점을 잡혔고, 외세를 끌어들인 대한생명 최순영회장을 얕보고 밀어붙이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지난해 금융·기업구조조정에 나서면서 금감위가 “이제 한국의 모든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자신들만은 그 원칙에서 빠져 있었던 것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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