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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고난의 땅... 멈추지 않는 '엑소더스'

굶주림을 참다못해 목숨을 걸고 중국 국경을 넘은 북한동포들의 비참한 삶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국제평화와 인권·난민지원센터인 ‘(사단법인)좋은 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이 지난해 말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북한접경 중국 동북부 3개성의 북한유민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노동착취뿐만 아니라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 중국 공안당국에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송환되면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지만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이들의 월경행렬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좋은 벗들’측은 현장조사를 토대로 중국 동북부에 흩어져 있는 북한난민들의 숫자를 3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좋은 벗들’관계자들이 5개월여간 현지에서 북한유민들을 직접조사해 최근 발표한 ‘북한 식량난민의 실태및 인권보고서’내용을 가능한 원문 그대로 정리했다. <편집자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월경

▦우리는 조선에서 몇해동안 배급도 주지 않으니 집기물을 팔아 옥수수가루를 사고 산나물을 캐어 푸대죽을 쒀먹었으며 산에 가서 땅을 파서 밭을 만들고 옥수수와 감자를 심었으나 여섯식구의 끼니를 이어가지 못해 나중에는 소나무껍질과 벼뿌리를 가공해 집식구들이 먹으니 변비가 생겼고 영양실조가 와 어린 두아이를 죽였습니다. 조선에서는 살아나갈 방법이 없어서 나머지 네식구가 도강하여 중국에 오는 도중에 또 열살나는 여자애를 죽이고 열세살 나는 아이와 남편, 그렇게 셋이서 중국에 계시는 사촌 시형집에 찾아왔습니다.(47·여·함경북도 명천군)

▦나의 아버지 어머님은 중병으로 앓고 있지만 약도 쓰지 못하고 우리 자식들을 살리려고 산으로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습니다. 제가 집 떠날 때 아버지는 이미 병에 지쳐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듣는 소문에 중국에는 노총각도 많고 입쌀도 많아서 개도 이밥을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중국의 돈 많은 집에 시집가면 우리집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떠나 도강했습니다. 중국에 와보니 총각들은 많지만 벌금이 심하여 모두 안된다고 했습니다.(27·여·함경북도 부령군)

▦저는 원래 안해(아내)도 있었고 세살 나는 딸애도 있었습니다. 몇해째 배고픈 공생을 하다 못해 안해는 저에게 쪽지를 써놓고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매일 어머니를 찾으며 배고프다고 울지, 나는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는 독한 마음을 먹고 아이를 안고 사람이 많이 모인 기차역전에 갔습니다. 그곳에 아이를 내려놓고 종이에다 이렇게 썼습니다.“이 아이는 양부모가 다 없으니 불쌍히 여기어 잘사는 집에서 가져다 길러주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글쪽지를 써서 아이손에 쥐여주고는 아이보고 “아버지가 저기 가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올께 여기서 기다려라”고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곳을 떠나 중국으로 이렇게 왔습니다(30·남·함경북도 온성군)

▦산나물을 캐어오고 소나무껍질과 피나무껍질을 가공하여 먹어도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여 집식구들이 굶게 되니 저는 어머니와 같이 중국에 도강해 오려고 강물에 들어섰습니다. 물결이 센 곳에 이르러 어머니가 넘어지게 되니 저는 쥐었던 어머니 손을 꼭잡고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다가 나도 같이 넘어져서 물속에서 뒹굴다가 어머니의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나는 몇 고패 뒹굴다가 다시 일어났으나 어머니는 일어나지 못하고 강물에 밀려 내려갔습니다. 저는 겨우 강역을 나왔지만 어머님은 끝내 시체도 찾지 못하고 말았습니다.(25·여·량강도 갑산군)

◇탈북유민의 중국내 생활

▦저는 양식이라도 구하려고 중국으로 도강해 왔다가 소개로 중국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이 못되고 남의 눈을 피하여 숨어서 살아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더욱 가슴아픈 것은 세살난 아이를 영양부족으로 잃어버리고 남편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살기위해 중국땅에 와서 이렇게 비법(불법)으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붙잡혀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시 밥 한술이라도 배불리 먹으려고 한 일입니다. 요즘에도 조선에서 많이 건너오고 있는데 우리마을에서도 중국사람과 결혼한 사람이 다섯이나 됩니다. 말을 몰라 안타깝기는 하지만 할 수 없다고 합니다.(32·여·함경남도 함흥시)

▦일자리를 얻으려 하니 일시키려는 집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타인의 소개를 받아 39세되는 한족에게 시집가서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온 사람을 붙잡는다는 소식을 듣더니 저에게 나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붙잡히면 많은 벌금을 내야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 저는 방법이 없이 그집에서 나와 떠돌아다니며 빌어먹고 있습니다. 사람같은 생활도 하지 못하면서 집식구들이 다 죽었는데 내가 살아 무엇하랴, 차라리 죽고말리라 마음먹었다가도 그래도 꼭 살리라 마음먹고 떠돌아다니며 빌어먹고 있습니다.(38·여·강원도 천내군)

◇인신매매

▦하루는 어머님께서 저를 불러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헤매며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바쁘니 인제는 방법이 없다.” 나는 처음에는 달통(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어머님의 그 말씀을 생각하니 옳았습니다. 하여 나는 어머님과 약속하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제리고 가서 소개하는 사람에게 돈 1만위안(약 130만원)을 받고 저를 팔은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제 자식을 타국에 팔겠습니가? 나는 그 심정을 리해합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나를 떠나보내면서 하시는 말씀이 “집 근심은 하지 말고 너하나만 가서 잘 살아라”하시고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녀는 이렇게 눈물로 작별했습니다.(24·여·함경북도 회령시)

▦우리 둘이 같이 도강하다가 동생이 얼음구덩이에 빠졌는데 마침 웬 청년이 방조해(도와줘) 살아났습니다. 우리 두형제는 이 청년을 따라가서 지냈는데 수일후 이 청년이 하는 말이 이곳은 변경이기에 위험하니 남방에 가면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둘은 귀인을 만난 것으로 생각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둘은 만원에 팔려 시집을 오게 됐던 것입니다. 나의 동생은 인물이 이쁘지만 저는 남자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겼습니다. 다행하게도 저의 동생(의 남편)은 40세되어 보이는 한족이었는데 저에게는 50세도 넘어 보이는 벙어리였습니다. 시집식구들은 제가 달아날까봐 밖에 갈 때면 살창문을 하고 자물쇠로 문을 잠궜습니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저를 벗기고 희롱했습니다. 저는 정신병이 올 정도로 되었습니다. 동생이 만난 신랑은 그래도 개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처지를 알아차린 동생 신랑이 저를 구해냈습니다.(27·여·함경북도 은덕군)

▦중국에 가 시집가서 제집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 둘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한 음식점에서 아가씨질하고 있습니다. 후에 우연히 우리 셋이 한사람에 2,000위안에 팔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술상에서 손님들과도 같이 술을 마셔야 하며 한상에서 20위안씩 팁을 받고 한 자리에 들면 50위안씩도 받았습니다. 제 조국을 버리고 타국땅에서 기실 매음녀생활을 하니 어떤 때는 자다가도 끔틀하며 내 왜 이래야만 되는가 하면서 눈물흘릴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릴 때도 많지만 먹고 사는데는 굶어죽기보다 낫기에 이런 일도 다행으로 생각됩니다. 돈좀 벌면 한번 조선에 갔다오려고 생각합니다. 돈이라도 가져다주면 어머님과 동생들은 살 것이 아닙니까. 살기만 하면 그 어느 때든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26·여·함경북도 청진시)

▦저는 중국에 오면 꼭 행복한 생활이 펼쳐지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큰 차이였습니다. 사람장사꾼은 저를 어느 한 중국의 이름 모를 한 산골 남자한테 팔아버렸습니다. 그 남자는 얼굴이 거무틱틱하고 난쟁이를 모면한 키가 작은 40안팎의 중년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알아듣지 못할 중국말을 지껄이며 나를 방에 가둬놓고 자물쇠로 잠가놓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밤이 되자 그는 술냄새를 풍기며 굶어서 움직일 맥도 없는 처녀인 저의 몸을 사정없이 유린하였습니다. 저는 아프고 서러워 날 샐 때까지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남자는 내가 도망칠까봐 쇠사슬로 저의 발목을 개 기르듯이 기둥에다 매놓았습니다. 저는 이런 비인간적인 생활을 반년이나 하였습니다.(21·여·황해북도 황주군)

◇탈북유민들의 노동착취와 매춘

▦나는 한번 도강하여 돈을 벌어보자고 결심하고 목숨이 겨우 붙어서 중국에 오니 일자리 찾기 힘들어 고생하다가 인분수레를 몰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먹고 자고 8위안(약 1,000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저는 조국에서 군대에도 갔다오고 대학공부도 했지만 이 모든 능력을 발휘할래야 할 기회도 없고 량식난(식량난)은 우리를 절반 머저리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중국에 와서 변소에서 인분을 처리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몸을 씻고 자리에 누으면 여러가지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45·남·강원도 법동군)

▦저는 외삼촌의 소개로 겨우 한 음식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한달도 채 되지 않는데 주인이 발견되면 만위안 벌금을 하게 된다고 하여 나가라고 하기에 그 음식점에서 나왔는데 다시 다른 곳에 가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외삼촌은 흑룡강성 령안시에 계시는 둘째 외삼촌께 전화를 하여 정황을 말하니 그 곳은 비교적 안전하고 일자리도 구할 수 있으니 저더러 오라고 하기에 외사촌동생과 같이 령안에 왔습니다. 와보니 이곳에는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을 붙잡지도 않고 와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저는 한 조선족이 꾸리는 개인음식점에서 자고 먹고 하루에 7위안을 받으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44·여·량강도 갑산군)

▦저는 친구와 함께 중국으로 왔습니다. 그 당시 소개로 연길에 있는 음식점에 복무원(종업원)으로 갔는데 결국은 몸팔고 돈버는 기생이 되었습니다. 음식점 주인은 50대였습니다. 우리 둘은 인물 체격이 괜찮았고 노래 또한 잘 불렀습니다. 술집에서 술 부어주고 같이 마셔야하고 함께 자기도 해야 했으니 처음엔 눈물 흘리며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주인이 짜르고 나도 남자들이 주는 팁이 적지 않았고 때로는 아버지뻘, 때로는 오빠뻘 닥치는대로 접대하였는데 어떤 이는 랭정하였지만 어떤 이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돈도 더주고 갈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고마워 그 후에 더 친절히 대해주었습니다. 몸팔아 집식구 살리는 형편이었습니다. 우리 둘은 때론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칠 때가 한두번이 아니고 부모형제 편히 살 수 있을 때까지 이 일하고 우리도 좋은 대상자(배우자)만나 살아야 되겠다고 다질(다짐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꿈은 길지 않았습니다. 동무나 나나 성병에 걸려 고통속에서 모대길 줄이야 생각도 못했습니다. 우리 둘의 운명은 왜 이런가요. 조국이 잘 살았으면 왜 타국에 와 몸팔며 살아야 하는가요?(26·여·함경북도 온성군)

◇꽃제비

▦떠도는 소문중에 중국에 가면 일거리가 많으므로 돈을 벌 수 있다기에 우리 꽃제비 넷은 도강하여 도문까지 도착한 후 서로 갈라져서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나는 우리 동포들의 지극한 도움으로 옷과 신을 지원받았지만 어느 분도 나를 자기집으로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이면 병원에서도 자고 밖에서도 잤습니다. 나는 도문을 떠나 의란이라는 곳까지 가서 밥을 빌어먹었는데 너무 지친 나머지 어느 집앞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집 아주머니의 관심하에 저는 3일동안 그집에 머물러 있다가 그 집어머님의 안내로 집짓는 곳에 가서 벽돌을 운반했습니다. 나는 키가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내가 열살이 조금 넘었는가 하면서 저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저는 갖은 곡절을 겪은 18세 청년이어서 도리를 번연히 알지만 그럭저럭 보내면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중국돈 300위안을 벌었습니다. 나는 또 의란에 있는 아주머님을 찾아갔는데 지금 조사가 너무 심하기에 자기 집에 더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연길에 가서 일거리를 찾거나 중고옷을 줄테니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잡히면 잡히리라 생각하면서 연길까지 와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혹시 동생이 보이는가 살피고 있습니다.(18·남·함경북도 무산군)

▦나는 연길시내에서 한국사람이나 노래방주인에게 돈을 빌어모은 것이 500위안이 되어 조선에 계시는 부모님께 갖다 주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공안에게 잡혀서 연길구류소에 갇혔습니다. 연길구류소에는 나같은 조선아이들이 30명이 잡혀 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랑 같은 방에 있었던 중국 벙어리 아저씨가 우리를 너무 못살게 굴어 우리가 달려들어 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감옥을 지키는 사람들이 우리를 마구 때렸습니다. 연길구류소에 한달간 갇혀 지내다가 조선으로 넘겨졌습니다. 나는 조선으로 넘겨지기 전에 신발바닥에 숨겨놓은 돈을 뺏기지 않으려고 돈을 비닐에 싸서 삼켰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넘어가서 3일동안 밥을 안먹었습니다. 밥을 먹으면 똥을 누게 되어서 돈이 나와버리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가서는 보위부들한테 피대(기계돌리는 가죽끈)랑 갈쿠리(쇠줄)로 맞았습니다. 먼저 보위부에서 죽게 맞고 또 안전부에 가서도 죽게 맞았습니다. 그런데 맞을 때 소리를 지르면 더 때리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악물고 매를 맞았습니다. 소리 한번 지르는데 매가 10대씩 늘어납니다. “너 이번이 몇번째야”하고 묻는데 세번째라고 대답하면 30대를 맞습니다. 손등을 때리기도 하고 잘 걷지 못하도록 다리를 때리기도 합니다. 상처는 나지 않고 시퍼렇게 멍만 들도록 때리기도 하지만 그렇게 맞고 나면 몇달이 지나서도 관절이 아파오곤 합니다.(16·남·함경북도 온성군)

◇체포, 강제송환, 처벌

▦나는 중국에 다섯번 왔다갔는데 마지막 번에 건너다가 붙잡혀 온성감옥에 갇혔습니다. 밀고가 들었고 자주 중국으로 다닌다는 소식에 중국에 가 어떤 사람과 접촉하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었기 때문에 혹독한 매로 많이 맞았습니다. 머리가 터졌고 다리뼈가 끊어져 반년이 넘는데도 지금도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감옥이란 진짜 일본놈때 혹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리도 틀고 두팔을 평형으로 들게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물매가 안겨지고, 말하면 거짓말하고 토실하지 못한다고, 입다물면 주디 붙었는가 하고 생트집이니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을 바엔 입을 완전히 다무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감방은 어두었을 뿐만 아니라 고약한 냄새로 사람을 질식할 정도지만 배고파도 한 시각있는 것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진짜 지옥입니다. 붙잡혀 맞아도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 나으니 다시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52·남·함경북도 온성군)

▦돈은 신바닥 밑을 도려 감추고 먹을 것 약간 준비하고 떠났습니다. 시간을 맞춰 강을 건너가 역전에서 기차를 기다리게 되었는데 불시에 닥치는 경비대에 수상한 감시로 되어 온성안전부로 가게 됐습니다. 안전부에서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 “중국에 갔다 오는 길이지. 살도 잘찌고 왔구나”하면서 욕질을 했습니다. 처음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였으나 옷 한켠씩 벗기면서 “이것이 그래 중국옷이 아니고 무엇인가”하면서 사정없이 때리는 통에 그렇다고 대답하니 “더러운 년, 중국남자새끼들이 그리 좋던가”하면서 말못할 욕들을 연속 퍼붓고 상정없이 때렸습니다. 온몸을 샅샅이 뒤지고 자궁에까지 무엇 감추고 왔는가 여자시켜 검사까지 하였습니다. 너무나 기막혀도 별 수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신은 뒤축을 보지 않고 신바닥을 꺼내 보았기에 돈만은 다행히 살렸습니다.(32·여·함경북도 무산군)

▦나는 흑룡강성에서 연변으로 나오던중 잡혀 조선으로 가게 되었는데 조선에서 22일이란 시일에 갖은 천대를 받으면서 겨가루 먹으면서 보냈습니다. 변비증으로 고생하였고 감방에 모든 사람(16명)이 모두 변비증에 걸려 신음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지냈으나 7일후엔 더는 견딜 수 없어 배부둥켜안고 누울 수 밖에 없었는데 누구도도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중 4명은 끝내는 숨졌습니다.(27·여·함경북도 청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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