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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임진강은 반세기를 내 눈물처럼 흐르네...

오후 2시가 넘도록 찾아온 손님은 단 한 명. 오늘도 영 장사가 시원치않다. 그래도 ‘임진각 사진사’ 정성춘(53)씨는 자못 태연하기만 하다. 사진 찍는 사람이 없으면 임진각 안내라도, 그도 청하는 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 시도 쓰고 수필을 써도 그에겐 하루해가 짧다.

“원래 이맘때엔 별로 손님이 없어요. 하지만 명절 2-3일전부터 사람이 많아지지요. 주로 북에 고향을 둔 분들이 오셔서 사진도 찍고, 망배단에서 제사도 올리고 저랑 얘기도 나누고 그렇게 친해진 분들이 많죠. 올 때마다 ‘야, 아직도 이 양반이 여기 있네’ 그러면서 반가와하는 분들도 많아요. 가끔 지루할 때도 전혀 없진 않지만, 언제 저를 찾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 이 자리를 뜨지도 못해요.”

27살부터 27년간 임진각 지켜온 터줏대감

27세에 시작, 27년동안 임진각의 ‘망향 사진사’로 자리해 온 정씨. 그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강정리가 고향인 실향민이다. 다섯 살때 피난 나온 고향은 그가 앉은 곳에서 눈만 들면 보이는 8㎞ 건너편. 발은 못가도 마음은 늘 고향을 맴돈다.

사진사 겸 아마추어 시인인 그는 친절한 가이드로도 인기가 높다. 그 특유의 실감나는 말솜씨 때문에 때론 자신이 직접 다른 사람들의 ‘사진모델’이 되기도 하는 임진각의 ‘명사’. 외국 취재진까지 솔깃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입담은 참으로 인간미가 넘친다.

“이 망배단이 어떤 곳이냐면요, 북녘땅 저쪽의 부모형제가 만약 돌아가셨다면 죽어서 영혼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다행히 살아계시다면 살아서 어서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비는 곳이예요. 철조망 저쪽에선 이쪽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눈물 흘리고, 이쪽에선 이쪽대로 저쪽 부모형제가 보고 싶어 울고…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수십년동안 목격해 온 애절한 사연도 여럿. “가족들 생일, 제사때면 찾아와 우시는 분들이 많죠. 명절때는 특히 심하구요. 얼마전에도 평남이 고향인 한 팔순의 할아버님이 오셔서 혼자 망배단에 술도 붓고, 제를 올리는데, 향로에 얼굴까지 비벼대며 어찌나 애달프게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우시는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구요. 하도 목이 메니까 소리도 잘 안 나와요. 그런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저도 눈물이 나곤 하지요.”

지난 6월엔 영혼결혼식도 있었다. 결혼을 약속한 연인과 헤어져 홀로 남쪽에 내려온 한 노인이 살아서 다시 만나리라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결국 홀로 외롭게 숨을 거두면서 그 유족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주인공은 빠진 채, 인형들이 대신해 치른 결혼식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서 이젠 이렇게 영혼으로 찾아갈 수 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에 정씨의 마음까지 우울했던 날, 그렇게 마음 아픈 날마다 한줄 두줄 적어둔 글이 수첩에 쌓였다.

그 중 하나가 ‘봄이 오는 민통선’. 이 시만 들려주면 실향민들 대개가 눈물을 흘린다며 그는 즉석에서 싯구 몇줄을 읊기도 했다.

‘망향각에 올라서 북녘하늘 바라보니/ 봄바람에 구름 한 점 친구찾아 흘러가네/ 펄럭이는 태극기는 평화위해 손짓하고/ 임진강은 반세기를 내 눈물처럼 흐르네/ 강건너 민통선에 들려오는 새 소리는/ 누구를 기다리다 새가 되어 날아왔나…(후략)’

다섯살때 고향떠난 그도 실향민

정씨가 고향 장단땅을 떠난 것은 다섯 살때였다. 한국전쟁을 피해 배 타고 피난 나온 것이 그 길로 마지막이었다. 그때가 6월의 어느날, 밤 10시쯤이었는데, 수시로 터지는 폭격에 밤하늘이 빨갛게 보이던 기억, 한쪽에선 북한군이 나타나 기관총을 쏘아대며 빨리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지르는가 하면 잠시뒤엔 국군들이 나타나 얼른 남쪽으로 가라고 재촉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남하 후 가족의 고생은 말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밭일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이었다. 형제는 모두 넷. 먹고 살기조차 급급한 처지에 공부는 엄두도 못 냈고, 그나마 막내인 정씨가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형제중엔 최고 학력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도 돈을 벌러 다녔다. 열네살때부터 주물공장에 취직, 몇 해 뒤엔 직접 행상을 다녔다. 아이스케키, 도너츠 장사 등 안 해본 것이 없다. 자전거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당시 창경원 주변이나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한때 캐비넷 만드는 공장, 수출 벽지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적도 있다. 그렇게 살다보니 창피하고 쑥스러운 일에도 이력이 났다. ‘지금 이런곳에서도 버티는 것도 워낙 어려서부터 고생을 한 경험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월남전참전, 전투수당 모아 장사밑천인 카메라 구입

20대엔 월남전 참전용사로 전장을 누볐다. 양구 백두산부대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월남전에 참전했다. 어차피 군대생활을 해야 할 바엔 이왕이면 남들을 돕고 싶기도 했고, 가난한 그에겐 참전군인들에게 주는 전투수당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트남에 있었던 기간은 약 1년. 머리 위로는 헬리콥터 ‘코브라’가 벌떼처럼 돌아다니고 길위에는 장갑차가 물결처럼 지나갔다. 보급차를 몰며 산악지대를 지날 때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베트콩의 기습을 막기위해 쉴틈없이 차창밖으로 기관총을 쏘아대던, 마치 액션배우같은 무용담도 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번 전투수당이 한 달에 51달러 (당시 국군은 3,000원을 받았던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꼬박 한국으로 부쳐 모은 돈으로 장사 밑천을 만들었다.

제대직후, 월남전에서 모은 돈 약 20만원을 헐어 13만원짜리 전세방도 얻고 청계천을 뒤져 9,500원짜리 중고 페추리 카메라를 샀다. 당시엔 카메라가 귀할 때라 잘만하면 벌이가 괜찮을 것 같았다. 특별히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직접 사진 만드는 곳을 찾아가 궁금한대로 몇가지 물어보거나 설명서를 봐가며 무작정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대전과 부산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허름한 여인숙에 몇일씩 머물며 동네 사람들의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 영정 등을 찍어준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떠돌이 생활이었다. 잘 찍고 돌아온 뒤 현상을 하다보면 간혹 사진속 머리가 반쯤 잘려나오는 등 처음엔 실수도 많았다. 그 때문에 두 번, 세 번 발걸음 하는 일도 많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노하우가 생겼다.

임진각이 세워진 이듬해인 73년. 정씨는 이곳으로 들어왔다. 지난 81년 북한군 도끼살인사건 만행이 일어났을 때는 정말 무슨 일이 터지는 줄 알았다. ‘당장이라도 한바탕 전쟁이 나겠다’ 싶을만큼 임진각에도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았다. 한산하던 광장에 갑자기 군인들이 긴급배치되고, 한쪽에선 ‘백악관에서 전화만 오면 당장이라도 싸움이 시작된다더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그때만큼 놀란 일은 지금껏 더 없었다. 워낙 북한쪽의 ‘수상한 짓’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던데다, 우리 국방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이다.

“서해교전때요? 다른 분들은 참 불안스러워하고 걱정을 많이 했겠지만, 오히려 이곳에선 별 동요를 못 느꼈습니다. 만약의 사태가 있다해도 지금 우리 군이 얼마나 앞서 있는데요. 그리고 이곳을 찾는 분들, 특히 실향민들도 별로 동요하는 것 같진 않더라구요. 평소와 다름없었죠. 그만큼 고향에 대한 애착이 다른 어떤 위협보다도 간절한 거겠죠.”

사진속 주인공들 하나둘 보이지 않을땐 ‘울적’

그의 사진속 주인공들 가운데엔 해가 바뀌면서 하나둘 보이지 않는 손님도 많다. 그사이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다. 요즘도 그와 친한 몇몇 노인들은 “자네는 젊었으니 언젠가 고향에 가보겠지만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글른 것 같다”며 힘없이 말해 그를 울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틀림없이 곧 보실거라”며 위로하는 정씨지만 그도 통일이 언제 올런지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통일이 되면 그도 당장 가 볼 곳이 있다. 어릴적 미끄럼을 타며 놀던 고향 잔디밭은 그대로 있는지, 까치밥에 산딸기랑 깜부기를 먹던 장단의 산이며 들판은 어떻게 변했는지, 두고온 선산 벌초는 누가 했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은것들 투성이다. 그날이 올때까지 그는 여전히 망배단 곁을 떠나지 못한다. 대목이래봐야 어쩌다 한번씩 하루 열대여섯장의 촬영수입이 고작인 작은 돈벌이지만, 더 잘 먹고 더 잘살기 위해 새 모험을 하는 것도 고향없이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나 가능한 얘기다. 망향 사진사 정씨에겐 통일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마음 급한 일이 없는 것이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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