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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의 축제... 홀로설 수 있을까

동티모르. 매일 일간신문의 국제면을 꼼꼼히 읽는 사람도 다소 생소하게 느낄 오지다. 이곳 주민들이 25년간 20여만명이 숨지는 저항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4일 긴급 소집된 유엔 안보리에서 “동티모르 주민투표 결과 투표자의 78.5%(34만4,580명)가 독립을 선택, 자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동티모르는 300여년의 포르투갈 식민지배와 25년간의 인도네시아 통치를 종식하고 20세기 마지막 독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험난한 앞날

하지만 투표결과가 동티모르의 미래를 온전히 보장해 주지는 않고 있다. 독립파와 자치파간의 오랜 적대감이 인도네시아의 묵인 속에 다시 표출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동티모르가 독립의 길을 간다면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공언해온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들은 투표를 주관한 유엔파견단(UNAMET) 직원들을 쫓아내고, 마을을 장악했다. 주도(州都) 딜리에서는 도로 곳곳을 차단하고 독립파 주민 거주지에 불을 지르고 있다. 독립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온 외국인 기자들도 신변의 위협 때문에 모두 탈출했다. 독립파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는 “이제 진정한 독립투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은 10월말 인도네시아 국민평의회가 법적으로 동티모르 독립을 인정해줄 때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치안을 맡고 있는 인도네시아 군부가 지지세력인 1만여 민병대의 무장해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하다. 이들은 주민투표를 인도네시아의 패배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지난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한 민주투쟁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당수 마저 공공연히 독립반대 의사를 밝히는 등 인도네시아 의회의 헌법개정 과정도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경제적 독립 난망

동티모르를 사실상 지배했던 25만여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은 독립이 결정되자 앞다투어 지역을 떠나고 있다. 동티모르인들은 스스로 4개의 대형발전소를 가동할 능력이 없다. 수십개의 은행 중 동티모르 출신 매니저는 단 2명에 불과하다. 사회 인프라 공백이 오고 있는 것이다.

경제전문가들은 동티모르 경제를 인도네시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15~20년은 걸릴 것으로 본다. 동티모르는 97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6달러로 인도네시아의 37%에 불과하다. 90%이상의 주민이 양철지붕의 오두막집에서 거주하는 절대 빈민층인데다 절반 이상이 문맹이다.

물론 동티모르인들은 풍부한 석유(매장량 3,000만 배럴)와 천연가스(960억㎥) 등 자원과 풍부한 관광자원을 효율적으로 개발하면 자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매장된 자원을 경제적으로 채굴하기까지는 10년 이상 걸리고 파내더라도 서구 열강이 눈독을 들이고 있어 얼마나 동티모르인의 손에 이익이 돌아갈지 의문이다. 또 치안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관광지를 개발할 가능성도 현재로선 기대하기 어렵다.

동티모르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이해관계

인도네시아가 25년동안이나 동티모르를 불법 점령하고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등 열강들의 동조와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열강들은 동티모르 주민들이 선거를 통해 독립을 선택한 지금도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세계경찰을 자부하는 미국은 시종일관 “동티모르의 질서유지 책임은 자카르타정부에 있다”는 입장이다. 동티모르 문제는 어디까지 인도네시아 몫이기 때문에 국제적 개입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르비아의 인종청소를 저지하기 위해 코소보 전쟁에 뛰어들고, 이 와중에도 이라크에 대한 폭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종래의 미국의 모습과는 다르다. 클린턴정부가 내세운 ‘개입(engagement)’을 통한 세계 안정 전략에도 부합하지 않다. 더구나 동티모르(가톨릭)는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적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과 서방이 조우하는 최전선이다.

미국의 미온적 태도는 무엇보다 동티모르보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이익이 크다는, 냉혹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골치아픈 동티모르에 한번 개입하면 엄청난 규모의 경제원조부담도 생길 수 있다.

사실 미국은 냉전시대부터 줄곧 인도네시아의 이익을 보호해왔다. 70년대 베트남을 비롯, 캄보디아 라오스가 차례로 공산화하자 미국은 수하르토 정권과의 전략적 연대에 나섰다. 특히 자국의 핵잠수함들이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로 티모르 북쪽 해협을 이용할 수 있길 바랬다.

미국은 심지어 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을 묵인했다. 당시 포드대통령과 키신저국무장관이 자카르타를 방문한 직후 90%이상 미국산 무기로 무장한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를 공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공개된 미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미군은 97년 3월 동티모르 주둔군 사령관이던 슬라마트 시다부타르 대령이 이끄는 ‘제2 지휘관 부대’에 박격포 훈련을 시켜주는 등 92~97년 인도네시아 민주화운동 진압군에 30개 이상의 훈련과정을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동티모르 주둔군은 반정부 주민 수만명에게 테러, 고문 등을 자행했다.

물론 다른 열강들도 전과(前過)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호주는 동티모르가 가진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자신의 앞마당에서 벌어진 인도네시아의 폭력행위를 눈감아 줬고,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도 인도네시아에 무기를 팔기 위해 애써 동티모르의 인권상황을 외면했다. 이슬람 국가와 제3세계 국가들은 1억9,000만명의 세계 최대 회교국이자 비동맹 세력의 지도적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비위를 거스르길 원치 않았다.

결국 자국의 실익에 기반한 국제사회의 냉정한 이해관계 속에서 민족의 자결과 인권, 평화라는 개념은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 동티모르 민중들은 지금도 외부사회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외롭고 긴싸움을 하고 있다.

동티모르 투쟁의 역사

호주 북부로부터 640㎞, 자카르타로부터 2,000㎞ 떨어진 동티모르는 16세기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됐다. 서티모르는 네달란드의 식민지가 됐다.

서티모르는 1949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했으나 말레이반도와 호주 및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제도 사이의 통로인 동티모르는 74년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남았다. 74년 포르투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자 동티모르는 75년 11월 마침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하지만 순간이었다. 영토확장 야욕에 불타던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부는 75년 12월7일 3만명의 군인을 동원, 동티모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자신들의 27번째 주로 편입했다.

이때부터 동티모르인들의 독립투쟁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20만~30만명이 사망했다. 여자들은 인도네시아 군인들에게 강간당했으며 정치적 체포와 고문, 실종, 협박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사나나 구스마오를 중심으로 한 동티모르인들은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96년 외교책임자 호세 라모스 호르타와 카를로스 페리페 벨로 주교가 노벨평화상을 수상, 동티모르 문제는 세계적 문제로 확대됐다. 인도네시아정부는 지난해 5월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경제위기와 민주화 투쟁에 직면하자 동티모르의 독립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이동준·국제부 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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