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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20세기 풍물.생활상] 그때 그시절을 아십니까

‘호롱불, 인력거에서 우주를 항해하는 인공위성과 ‘정보의 바다’ 인터넷까지…’

지구의 역사는 약 46억년. 그속에서 인간은 400만년이 넘는 오랜 진화 과정을 거듭해 왔다. 이런 유구한 인류 역사속에서 20세기 100년이라는 기간은 극히 미세한 한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호흡해온 이 100년은 이전에 인류가 창조한 모든 문명의 이기를 합친 것보다 더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난 전환기였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말 쇄국정책으로 서양의 문물을 늦게 받아들여 일제 강점의 수난을 맞기도 했지만 반도국의 특성답게 20세기의 과학 문명의 수혜를 하나둘씩 받아 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갔다.

우리의 근대화는 고종31년(1894년) 재래식 문물 제도를 서양의 법식에 맞춰 고친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기점으로 잡는다. 이 시기를 전후해 1899년 5월 인력거를 대신할 전차가 종로통에 개통됐다. 그해 9월 경인선(노량진-인천) 철도가 개통되는 등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꼭 100년전이다.

1916년 첫 국산화장품 ‘박가분’탄생

무당·주술 같은 기복 신앙이나 기껏해야 풀뿌리 약초에 의존했던 국민 건강은 1885년에 신식병원인 ‘광혜원’이 설립되면서 부터 크게 향상되기 시작했다. 이후 종기 치료제 ‘이명래 고약(명래제약)’, 소화제 ‘활명수(동화약방)’, 두통 치료약 ‘노신(한국양행)’, 지금의 치약 대용인 ‘치분(금강치마분)’ 등 양약 출시가 잇달았다.

근대화에 가장 민감한 부류는 역시 여인네들이었다. 스커트가 도입되기 전인 1910년 전통 한복을 개량한 통치마에 긴 저고리가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6년 첫 국산 화장품인 박가분(舶家粉)이 시중에 유통돼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아직 머리에 비녀를 꼽고 다니던 1920년, 최초의 미용실인 ‘경성 미용실’이 개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욕구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국내 이발소는 이보다 빠른 1901년 ‘동호이발소’가 최초였다. 물론 이용자는 신지식인 등 극소수에 그쳤다. 여성들이 서양 풍속에 빨리 적응한 반면 남자들은 일본의 단발령과 창씨 개명을 거부하는 등 비교적 우리 전통에 대한 애착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경제개발이 본격 시작된 60년대 들어서 서양 문물이 밀물듯이 몰려오면서 가장 먼저 여성들의 옷차림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초·중·고 학생은 물론 대학생까지 교복을 착용하던 그 시절, 신여성 사이에서는 핫팬츠와 판탈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67년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TV에 등장하면서 미니스커트 열풍이 전국을 강타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은 육교나 계단 아래에서 각선미를 훔쳐보는게 유행이 될 정도였다. 경찰은 70년대초까지도 ‘건전한 풍속을 해친다’며 자를 가지고 무릎위 20㎝ 이상 높이의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적발, 경범죄로 처벌하기도 했다.

‘꿀꿀이죽’으로 허기 달래던 전후

젊은 남자들 사이에선 통기타와 함께 장발이 유행했다. 이로인해 시내에서 경찰과 장발족과의 숨바꼭질이 벌어지는 촌극도 비일비재 했다. 1957년부터는 야간통행금지도 실시돼 자정이 가까워지면 귀가 전쟁을 치루었다. 당시 야간 통행증은 고위층들의 특혜로까지 인식될 정도였다.

하지만 6·25 직후의 생활상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거리에는 아이에서 어른까지 밥을 빌어먹는 거지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먹다 버린 햄이나 치즈 빵조각과 스프 등을 섞은 소위 ‘꿀꿀이죽’이라는 음식이 이들의 주식이었다. 또 매년 5,6월이면 어김없이 오는 보릿고개는 1972년 개량 품종인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학생 도시락에 ‘보리쌀 30% 의무화’를 실시, 이를 어기는 학생들을 징계하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졌다. 식량 절약을 위한 또 다른 방편으로 전국적으로 일제히 쥐약 놓기도 있었다. 죽은 쥐를 먹은 개나 고양이가 죽는 일도 잦았다. 또 학교에서는 쥐잡기를 실시, 학생들이 쥐꼬리를 잘라 학교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러다 80년대 식량자급화가 이뤄지면서 금지했던 쌀막걸리와 쌀과자 제조가 허용됐다. 현재 값비싼 외국산 패스트푸드점이 호황을 누리는 것과 비교하면 비참한 시절이었다.

당시는 위생 상태도 좋지 못해 이, 서캐, 벼룩이 창궐했다. 학교나 보건소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불청객을 퇴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DDT를 온몸에 뿌려 주기도 했다. 당시 집에서 속옷에 붙어있는 이를 잡거나, 참빗으로 머리속 서캐를 긁어내는 장면은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또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식중독, 다래끼(눈병), 볼거리, 폐병과 같은 후진국형 질병이 성행했다.

인류 최고의 기호품 담배도 1927년 1월 완전 전매제가 실시되면서 본격적으로 다품종, 고급화시대에 들어섰다. ‘금관’‘아리랑’‘재건’‘진달래’‘파고다’‘신탄진’에서 ‘청자’‘거북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했다.

술도 막걸리에서 소주쪽으로 옮겨갔다. ‘진로’‘선양’‘금복주’‘백화’‘경월’‘우정’‘보배’등 갖가지 종류가 쏟아져 나와 애주가들의 구미를 당겼다.

고무신은 닳는게 아까워 들고 다니기도

어려웠던 시절,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버리않는 근검절약이 몸에 뱄었다. 짚신 밖에 없던 1920년 첫선을 보인 고무신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왕자표제 흰 고무신인 ‘독백녀’와 한일고무의 어린이용 ‘꽃신’은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였다. 찢어진 고무신도 달아 떨어질 때까지 기워 신었다. 구멍난 양은 냄비는 땜질해 사용했고 양말이나 옷도 모두 꿰매서 입었다. 당시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해방 전후 한국 문학의 기저에는 언제나 한(恨)이 스며 있었다. 1914년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 김소월의 ‘진달래꽃(1922년) ’, 나운규감독의 영화 ‘아리랑(1926년)’, 홍명희 장편소설 ‘임꺽정(1928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1939년)’등과 같이 서로 장르는 다르지만 억눌린 민족의 울분을 표현한 저항 문학이 주류를 형성했다.

초가집 안방에 빼곡이 걸려있는 빛바랜 흑백 가족사진, 정겨운 엿장수 아저씨의 가윗 장단, 장터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뻥이요’외침, 구공탄을 머리에 인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 지금은 추억속의 아쉬움으로만 남아 있어야할 우리 선조들의 자화상이다.

송영웅·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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