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치과의사 겸 재즈뮤지션 민병진씨

10/20(수) 20:41

그는 ‘잘 저지르는’ 남자다. 저지른 역사로 치면 의사라는 의사중 그같이 이단같은 사람도 드물다. 특히 생일때만 돌아오면 뭔가 ‘기념’을 하고야 만다. 7년전 마흔번째 생일땐 느닷없이 병원문을 닫고 나가 며칠동안 배회를 하더니, 요즘은 내년 생일에 터뜨릴 신곡발표회준비로 작곡까지 시작한 재즈가수가 돼 있다. 10여년전엔 본업과 전연 무관한 이색패션쇼를 연 적이 있고, 한때 경제전문지 ‘ROI’ 발행인이기도 했다. 또 성폭력상담소 상임이사이기도 하고, 한때 청소년용 유학정보집을 펴 내기도 했으며 한 라디오 방송엔 치과상담이 아닌 인생칼럼의 고정연사로 출연하고 있다. 그외 스무개나 되는 모임에도 분주히 쫓아다닌다. 그러나 아직도 이만한 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이제까지는 연습, 앞으로가 실전!’이라고 외치는 40대 후반의 ‘청년’. 치과의사 민병진(47)의 이력서는 너무도 빽빽하다.

“가만히 있으면 전 불행한 사람입니다. 뭔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하고 싶은게 있으면 꼭 해야됩니다. 원래 3대째 의사집안이라 의사외의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치과의사만으로 평생 살기는 너무 억울합니다. 사실 제 적성은 따로 있는데, 너무 늦게 알았고, 너무 늦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굳이 본업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제2의 직업으로 삼아 함께 살아나가는 것도 멋진 일입니다. 바깥으로 보이는 당장의 직업이 무엇인가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 그게 제겐 가장 중요한 거죠.”

대학시절 밴드구성, 만만찮은 실력

그 숱한 ‘외도’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건 음악분야다. 의사 겸 재즈음악인으로 알려진 그는 이력도 화려하고, 실력도 만만치않다. 이미 대학시절 가수 이수만과 4월과 5월의 백순진, 김태풍과 밴드를 구성, 활동한 경력이 있다. 병원안엔 상설 음악실까지 마련해두었고, 진료만 끝나면 서울 강남의 한 재즈클럽으로 직행, 밤무대의 재즈연주자로 서기도 한다. 지난 6월엔 ‘Over the Rainbow’라는 팝재즈 콘서트도 열어 재즈음악인으로서 정식 신고도 마쳤다.

“티켓을 사지 못해 뒤늦게 온 100여명이 그냥 돌아갈 만큼 성황이었습니다. 공연 자체도 꽤 규모가 크고 알차게 꾸며졌지만, 특히 찾아온 중년 관객들은 그 공연을 보면서 과연 자신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정신차리고 인생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되더라는 얘기들을 많이 하더군요.”

남의 노래만 부르는 것도 서서히 끝. 오후6시 마지막 환자를 보고나면 바로 작업실로 직행해 철지난 팝송들을 리메이크 하거나 직접 자작곡을 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1주일중 하루는 서울 재즈아카데미에서 연습하고 이틀은 강남의 한 재즈클럽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 그래도 못 다 익힌 무대매너는 “똑같이 손 하나를 뻗어도 춤을 배우고 뻗는 손과 그냥 내뻗는 손이 다르더라”며 재즈발레학원까지 찾아 다니는 완벽파.

운동도 워낙 좋아해서 한번 시작했다하면 테니스는 연속 5시간, 축구는 3시

간을 쉬지않고 뛰는 강철체력. 그러나 슈퍼맨처럼 종횡무진 다니던 그도 요즘은 8시간을 자고도 숙면이 쉽지 않아 수면제까지 복용하는 신세다. 이를테면 이것도 예술가의 징후가 아닐까?

“신경이 좀 예민한가 봅니다. 대학때부터 괘종시계 없이 살았습니다. 똑딱

거리는 초침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는거죠. 그래서 다 치워버렸더니, 그래도 어디선가 똑딱거리더라구요. 알고보니 제 심장에서 나는 소리더군요.”

튀는 일상, 튀는 병원, 일 꾸미기 명수

재즈인으로서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지만, 한켠에선 ‘치과는 그만 팽개친거냐’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럴때마다 “본업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말하는 그는 실제로 그 바쁜 와중에도 의료에 관한 모종의 프로젝트까지 현재 추진중, 진료에서부터 병원관리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내년중 발표할 것이라는 그 내용은 ‘대외비’. 그러나 “일단 발표되면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정색을 한다.

의료계 안에서 일으킨 화제들도 적지 않았다. 개업초기, 점잖은 흰색 외벽 일색의 병원건물부터 미술대 학생들을 불러다 미키마우스 의사에 하마 환자, 백설공주 간호사 그림으로 과감하게 덮어버린 일. 의사 3대를 잇는 그의 아버지 조차 아들 꿍꿍이를 이해 못할 정도였다. 정작 알려야 할 치과의원 이름은 깨알같이 만들고 파란 하늘에다 구름 몇 점 대문짝만하게 그려 만든 간판은 더 장관. 병원안에서 클래식 강좌를 연 건 그에 비하면 클래식한 사건이라 할 만 하다. 워낙 일 꾸미기의 명수이다보니 요즘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대뜸 “이번엔 또 뭐냐”고 선수 쳐 물어볼 정도, 그렇게 튀다보니 같은 의사들 사회에선 오해나 견제도 제법 받아왔다.

“초창기엔 환자들이 와서 ‘민원장은 매일 골프만 치러 다닌다면서요?’하는 겁니다. 원래 전 골프는 제대로 운동한 것 같지도 않아서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데, 알고보니 밖에서 저에 대한 별별 소문이 다 돈거지요. 한동안은 제가 이민갔다고, 병원도 관뒀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어요. 실은 이 병원(서울치과병원)도 그런 소문때문에 나온거지요. 원래는 민치과라고 개인병원이었는데, 그런 소릴 듣고는 너무 화가 나서 오히려 종합병원으로 더 크게 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떠날 사람같으면 이렇게 더 투자하겠냐’고 했습니다. 제스타일이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가 죽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식으로 더 공격적으로 맞서서 대처하는 거죠.”

3대째 의사집안, 유학시절엔 ‘죽도록’ 공부

1952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외과의인 조부와 이비인후과의 아버지를 둔 의사집안 출신. 대학시절엔 가수로 나갈까를 고민할만큼 음악을 좋아했던 그지만 그 때문에 말썽을 피운 적은 없다. 어려서부터 고분고분 공부만 했을뿐더러, 아버지 역시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의 선친은 대단한 오디오광으로, 헨델부터 비틀즈까지 소장한 희귀음반도 꽤 많았다. 어떨 땐 방송국에서 그의 부친을 찾아 음반을 빌려가는 경우도 허다하게 보았다. 초,중,고 시절 거의 매년 개근을 할 만큼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고등학교시절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학생입장 불가’의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나 쇼만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본 일이 유일한 일탈이었다.

1971년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과 1학년때 엑스타스라는 그룹사운드 리더 겸 키보디스트로 활동, 노래든 연주든 원껏 즐기며 살았다. 한번은 농대에 다니는 친구가 노래 잘하는 친구가 있다며 누군가를 데려왔다. 이수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목소리가 좋았고, 둘은 죽이 잘 맞았다. 그리고 이후 ‘4월과 5월’과 만나 ‘들개들’이란 밴드를 조직, 명동의 맥주집 ‘로즈가든’에서 밤마다 노래를 부른 것도 1년쯤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부의 짐이 닥치면서 결국 음악활동을 접었다. 유학을 위해 미국 50군데 대학에 일일이 입학신청서를 썼던 그는 이후 하버드 대학원과 보스턴대를 거쳐 미국 치과의사 면허증을 땄다.

가기전부터 들었던 것이 미국 학생들 사이에 떠돈다는 치대생 신드롬. 아침마다 구역질이 나거나 어지럼증이 나는 증세로, 그만큼 치과대학 공부가 ‘치사량’ 수준이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유학시절은 그의 평생 가장 힘겹고, 독서량이 많았던 시기였다. 어려운 원서를 매주 한권씩 과제물로 읽어대자니 음악이고 뭐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가장 겁난게 졸업장 못 따고 돌아오는거였어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든 공부였지요. 88년엔가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고 인터뷰를 할 때 어느 기자가 ‘훈련이 힘들땐 어떻게 이겨냈냐’고 묻자 ‘너무 힘들땐 그냥 차에 뛰어들고 싶더라’고 대답했는데, 방송에서 그 얘길 들으면서 저는 코끝이 찡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딱 그 심정이었거든요. 어찌나 두렵고 힘든지, 유학중 가장 큰 소원이 교통사고가 났으면 하는 거였어요. 차라리 사고가 나면 그만 공부를 중단해도 될 구실도 되고…, 그렇게 죽도록 공부만 했지요.”

세월 가는게 무서운 ‘40대의 나이 스트레스’

귀국후 2~3년간은 병원 일에만 몰두 했고, 얼추 자리를 잡은 뒤 다시 음악이며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공이 교정학이라 의사들중에서도 비교적 여가가 안정적인 편.

서른다섯에 들던 해엔 뜻하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한 자동차전문지에 미국 여행기를 기고하고 있었는데, 필자인 자신의 이름옆에 ‘35세’란 글자가 또렷이 박혀있었다. 평생 20대처럼 뛰어다니던 그에겐 거의 암 선고처럼 가슴 철렁했던 모양이다. 당장 ‘민병진 5개년 계획’이란걸 세웠다. 적어도 5년에 한번쯤은 뭔가 일다운 일을 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마흔에 들던 해 더욱 심각한 ‘사추기’까지 겪은 뒤엔, 아예 5개년 계획을 1년단위로 바꿔버렸다.

책을 내든 공연을 하든 매년 하나쯤은 뭔가 터뜨리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건 어쩔수 없는 조바심. 남보다 몇배의 배역으로 신나게 살아가는 요즘도 9, 10월만 되면 어김없는 나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이, 그도 어쩔수 없는 중년세대인 것이다.

“30대의 하루랑 오늘 하루가 완전히 다릅니다. 40대가 되면 시간가는 속도가 더 빨라져요. 방송 칼럼땐 저도 ‘행복은 다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천연덕스레 얘기하지만 사실은 제 자신도 그게 잘 안 될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나이를 초월하려 애를 쓰는건지 모르지요.”

‘중년문화 붐’ 일의키기 위해 또다른 ‘음모’ 준비

나이를 먹는다는건 반드시 손해막심한 것도 아니다. 원래 싫으면 싫은 것을 반드시 표시하는 직설화법의 명수였던 그는 이제 ‘만나는 사람은 적을 만들지 말고, 그게 아니면 아예 만나지 말자’는 새 철학도 얻었다.

음악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가리는 장르도 없고, 요즘 컴퓨터 세대들이 즐기는 MP3를 따라잡지 못하는 게 답답할 뿐, 조성모나 SES, 베이비복스 등 듣는 귀는 여전히 10대까지 커버한다.

의사친구들보다는 의기투합한 ‘문화동지’들이 더 많다. 술과 잡담의 시간대신 투자해 사귄 사람들이다. 비슷한 연배에 서로의 관심사와 마음이 잘 통하는 이들을 모아 만든 것이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조만간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서 또하나의 중년문화 붐을 일으킬 계획을 갖고 있다.

무대에 서면 ‘Over the Rainbow’와 ‘Feeling’등을 즐겨부르는 의사 겸 재즈인 민병진. 40에 무지개를 찾은 그가 3년 뒤 50땐 또 어떤 신곡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정말 다음 ‘건’은 또 뭘까?

도적적이고 공격적인 중년

“어떤 무인도에 갇혔는데, 자꾸만 밀물이 차오르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그대로 물이 다 차올라 죽게 될 상황이죠. 이럴 때 방법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대로 기다리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다리는 동안 수영을배워서 물이 다 차기 전 빨리 다른 섬으로 옮겨가는 겁니다. 중년이 그렇습니다. 좀 복잡하고 피곤하긴 하지만, 정말 자신의 인생을 지키고 싶다면 더욱더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사는 것 이상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중견 의사 겸 재즈인 민병진의 중년 위기 진단은 참으로 명쾌하다. 본인 스스로도 힘겨운 자기갈등의 터널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도전과 자기파격을 통해 새로운 중년의 입지를 세워낸 경험자이기 때문이다.

‘퇴출순위 1위의 희생양’‘구닥다리 세대’로 치부되는 40~50대 중년층에 대해 그는 강력하게 ‘무죄’를 주장한다.‘문화부재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경제 성장을 위해 일벌레로 노력하는 동안 그들만의 문화나 정신세계를 만들지 못한 것은 그들만의 잘못 아니라 우리 사회 공동의 책임’이라는 것. 또한 미래의 평균수명(90세 이상)을 감안하면 오히려 중년이야말로 인생의 황금기이며, 새로운 도전의 적령기로 다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황금세대의 복권(復權)을 위해 그는 ‘40~50대 신문화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6월29일 서울에서 가진 민씨의 콘서트는 그 식전행사나 다름없는 셈. 이미 각계 40~50대 인사들로 이뤄진 ‘문화를 사랑하는 모임’이 내부적으로 구성돼 앞으로의 활동을 예비하고 있다. 박영사 안종만사장, 한백연구소 공성진소장, 광주요 조태권사장, 연세대 추애주교수, ‘원스 인 어 블루문’의 임재홍사장 등이 그들로, 중년층을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통해 제2의 문화부흥을 꾀하고 있다.‘더이상 10대에게 떠밀릴 수 없다’는 이 40, 50대 황금세대의 숨은 에너지 폭발이 어떻게 이어질지, 그간 미디어 독점세대로 군림하던 신세대들의 자리가 자못 위태롭게 보인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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