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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스파이] 빼내고 지키고.. 정보기관과 경제안보

95년 중반 독일 유력신문들은 프랑스 정부의 산업스파이 행위를 비난하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94년 한국의 고속철도 기종이 프랑스 알스톰사의 테제베(TGV)로 결정된 것은 프랑스 정보기관 대외안보총국(DGSE)의 공작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DGSE가 유력한 낙찰 후보였던 독일 지멘스사의 협상내용이 담긴 팩스를 중간에서 가로채 알스톰사에 넘겼다는 것이 공작의 전말이다.

95년 6월 미일 자동차협상에서 일본 협상단은 시종일관 미국 협상단에 끌려 다녔다. 미국이 일본의 협상전략을 빤히 들여다 보는 듯이 회담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역시 미 중앙정보국(CIA)이 개입했다. 미 언론에 따르면 CIA는 본국과의 통화를 비롯한 일본 협상단의 내부 정보를 모조리 도청해 미국 협상단에 알려 주었다.

냉전종식은 산업스파이 세계에서 국가와 민간기업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각국이 경제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냉전기 이념전쟁의 선봉에 섰던 정보기관들이 산업정보 획득과 방어에 주력하고 있다. ‘첩보활동은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정보세계의 불문율. 냉전시절 양성됐던 거대한 첩보조직이 경제전쟁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은 것이다.

미국은 클린턴 1기 행정부 말기 CIA를 개편하면서 경제첩보 활동을 임무에 공개적으로 포함시켰다. 경제첩보에는 민수용으로 전환 가능한 이중기술에 대한 보호 뿐 아니라 자국 기업을 위한 노골적 스파이 행위까지 포함된다. 지난해 일본 교도통신은 CIA가 파견한 일본내 산업스파이만 110여명에 이른다고 보도한 바 있다.

경제첩보 활동은 CIA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가안전보장국(NSA), 연방수사국(FBI), 각 군 정보기관 등이 CIA와 긴밀히 협력하는 하나의 서클을 이루고 있다. 미국이 냉전기 영연방 우방국들과의 협력하에 전세계적으로 운영했던 도청망 에슐론(ECHELON)을 경제정보 획득용으로 활용한 것이 한 예다. 미 정보기관들은 96년 에슐론에 포착된 프랑스 톰슨CSF사와 브라질 정부간의 레이더 판매협상 내용을 미국기업에 넘겼다. 계약은 그 뒤 미국기업에 돌아갔다. 에슐론에는 NSA와 CIA, 영국 정보기관인 정부통신본부(GCHQ)가 참여하고 있다.

프랑스 DGSE도 이에 못지 않다. 프랑스 국적기인 에어 프랑스 기내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국에 파견된 기관원을 경제첩보 활동으로 전용하고 있다. 영국의 MI5(국내담당)와 MI6(해외담당), 독일의 정보부·헌법보호청·방첩대 등 3대 기관, 국가보안위(KGB) 후신인 러시아의 연방보안부(FSB)와 대외정보국(SVR) 등 각국 정보기관들도 경제안보의 선봉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본은 독립된 국가정보기관은 없다. 하지만 법무부 공안조사청, 방위청 정보본부, 통산성, 외무성 국제정보국 등이 민간 종합상사와 공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의 한 정보관계자는 “일본의 첩보기관들은 내부 협력 뿐 아니라 종합상사들과의 정보 공유도 매우 잘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정보기관 커리큘럼에 아예 산업스파이 양성을 위한 필수과정을 두고 있다. 중국은 국무원 직속 국가안전부(MSS)를 필두로 50여개의 정보기관이 당·정·군 산하에 조직돼 있다. 개혁개방 정책과 더불어 이들 정보기관들은 선진기술 획득의 첨병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3월 미 경제전문 포천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산업스파이 국가로 중국이 지목됐다. 이어 일본, 프랑스, 영국, 캐나다가 꼽혔으며 한국도 10위권 내에 들었다.

중국은 한국 산업계에도 위협적인 존재다. 급속한 경제 자유화 정책으로 사영기업 수가 급증하면서 이들의 기술 수요가 늘어나는 것이 그 원인이다. 특히 중국 기업은 손쉽게 제품화가 가능한 한국의 중·고급 기술을 탐내는 경향이 높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한국에서 개발된 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돼 헐값으로 수입되는 바람에 해당 기업이 도산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정보기관들도 자국 방산업체의 해외수주 등에 직접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독일 언론들은 90년대 초 세계각국에서 암약중인 러시아 산업첩보 요원들이 10만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도쿄 경시청은 지난해 2월 러시아 SVR 요원 4명이 8년간 일본에서 첨단기술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해온 사실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세계는 치열한 경제첩보전의 와중에 있다. 독일의 가이거 정보부장은 지난해 “산업스파이로 인해 매년 독일에서 5만명이 실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스파이가 실직률과도 무관하지 않음 강조한 것이다. 경제전쟁 시대의 안보정책은 냉전기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적 우방이 경제적 우방일 수 없고, 경제적 파트너가 경제적 친구일 수도 없다. 오직 국익이 있을 뿐이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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