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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휴화산 SK] 'OK! SK' 좌우할 후계구도

“마침내 미군을 몰아냈다.”

어떤 사람이 한 말일까. 대부분 “1975년 미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 월남을 패망시킨 월맹 공산주의자들이 한 말이 아니냐”라고 대답하겠지만, 실제로는 1991년 6월10일 한 필리핀 시민이 한 말이다. “2차대전 이후 필리핀에서 미군이 패주한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다만, 미군을 몰아낸 것은 당시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코라손 아키노의 외교술도, 필리핀 반군의 공격도 아닌 ‘피나투보 화산’이었다.

1991년 6월9일,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80㎞ 떨어진 한가한 농촌 마을에서 해발 1,745m의 휴화산이 폭발했다. 611년 동안 침묵을 지키던 ‘피나투보 화산’이 침묵을 지킨 세월만큼이나 엄청난 파괴력을 순식간에 터뜨린 것이다. 207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1만5,000명의 주민들이 안전지대로 대피해야 했다. 세계 최강 전력의 미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나투보 화산에서 동쪽으로 16㎞나 떨어진 클라크 공군기지에 근무하는 전 병력이 철수명령을 받고 트럭이나 버스에 올라타 허겁지겁 대피해야 했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휴화산.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4대 재벌을 평가한다면 단연 SK그룹이 휴화산을 닯은 그룹으로 지목될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건실한 수익력, 착실한 부채비율 축소, 유능한 전문 경영인 등 나무랄 데가 없지만 속으로는 말 못할 고민이 많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SK그룹은 600여년이 넘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1991년 6월9일 이전의 피나투보와 흡사하다. SK그룹의 경우 이미 부채비율 200%를 맞춘 삼성그룹을 제외하고는 6월말 현재 부채비율(227%)은 현대(340.8%), LG(246.5%)와비교할때 월등하다. 1998년말 부채비율이 377%로 삼성(280%), LG(360%), 현대그룹(323%) 등 4대 그룹중 가장 높았던 것과 비교하면 가히 놀랄만한 성적이다.

SK그룹은 또 1999년 8월까지 당초 목표보다 28.7%나 많은 6,192억원의 유상증자를 실시했으며 계열사 정리(140%), 자산매각(95.2%), 외자유치(73.0%), 채무보증해소(93.9%) 등에 있어서도 모범적 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에 따라 SK그룹의 구조조정 실적을 점검하는 제일은행 관계자들은 “SK전담팀(4명)의 경우 특별히 일이 없어 4명중 1명을 대우전담팀(19명)에 파견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4대그룹중 총수중 유일하게 전문 경영인인 손길승 회장의 존재는 최근 정부의 강도높은 재벌개혁 압박을 감안할 때 SK그룹으로서는 엄청난 자산인

그렇다면 도대체 SK그룹을 ‘피나투보 화산’과 비교하게 만드는 속사정은 무엇일까. 정답은 매우 간단하다. 최종현 회장이후 SK그룹을 이끌어 갈 후계구도가 아직까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98년 최종현 회장이 작고한뒤 최 회장의 2세들과 73년 사망한 최종건 창업주의 2세들이 일반의 예상을 깨고 손길승 회장을 추대, ‘하나의 SK’라는 원칙에 합의했지만 이같은 합의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재계의 분석이다.

실제로 SK그룹 내·외부에서는 12월초로 예정된 SK텔레콤의 임원인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SK그룹 계열사중 SK케미칼, SK상사, SK유통을 맡고 있는 윤원, 신원, 창원씨 등 최종건 창업주의 2세들이 과연 SK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SK텔레콤을 최태원 SK㈜회장의 ‘온전한 몫’으로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일정 지분’을 요구할 것인지의 여부가 SK텔레콤의 임원인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SK텔레콤의 연말 인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특히 무선사업 본부장인 표문수 전무와 기획조정실장인 강용수 상무의 거취에 주목하고 있다. 최종현 회장의 큰 누님(최양분)의 아들인 표전무와 97년 SK정유에서 SK텔레콤으로 자리를 옮긴 강상무 모두 최태원 회장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강상무가 연말 인사에서 승진할 경우 최태원 회장의 친정체제가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손길승 회장과 최종건 창업주의 막내 아들인 SK상사 최창원(36) 전무의 역할도 향후 SK그룹의 ‘경영권 정리’과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우선 손회장의 경우 비록 정부의 재벌정책에 부합하는 ‘전문경영인 총수’라는 상징성이 있다. 하지만 재계의 뿌리깊은 ‘오너 총수’관행을 깨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 많다. 결국 관심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최태원 회장이 전면에 등장할 것인가 이다.

또 상당한 경영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최전무의 움직임도 관심거리다.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창원씨의 경우 최근 협력업체와의 간담회에서 뛰어난 경영감각을 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최전무가 SK그룹의 간판 계열사를 맡게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결국 SK그룹 2세 경영진들의 행보여부에 따라 SK그룹이 ‘재계의 활화산’이 될지 아니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이 될지의 여부가 달려있는 셈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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