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아듀 1999] 땅에 떨어진 훈장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는 내년 봄 임시국회를 지켜보고 있다. 무공수훈자회는 무공훈장과 보국훈장을 탄 사람들로 이뤄진 단체다. 회원 2만4,000명 중 2만2,746명이 각종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들이다.

회원들이 국회를 주시하는 이유는 정치 정상화를 바라는데 있지 않다. 관심의 초점은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이 자신들의 요구대로 개정될 지 여부에 있다. 이들은 무공수훈자들에 대한 예우(경제적 보상)를 다른 수훈자들과 동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깟, 쇳덩이,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수훈자회 이운화 조직부장의 이야기. “무공수훈자는 전체의 3.7%에 불과한 1,400명만 월 7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다. 다른 수훈자들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내부 여론이 비등점에 다달았다.

내년 봄 국회에서도 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회원들이 훈장을 집단 반납할 가능성이 크다. ‘쇳덩이에 불과한 훈장을 갖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자칫 내년은 ‘대한민국 서훈사상 최악의 해’로 기록될 지 모른다. 이같은 우려는 이미 부분적으로 현실화했다. 지난 9월17일 수훈자회 서울지부 간부 18명이 자신들의 훈장을 반납했다. 무공훈장 서훈자 뿐 아니다.

지난 8월3일 씨랜드 화재참사로 아들을 잃은 김순덕씨가 체육훈장을 반납한 것을 필두로 지금까지 모두 60개의 훈장이 반납됐다. 독립유공자 후손이 반납한 건국훈장 20개, 퇴직교원의 국민훈장 21개가 포함된다.

48년 건국 후 98년 말까지 수여된 훈장의 총 수는 34만7,769개. 이중 60개 반납됐다면 숫적으로는 미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훈장반납을 제도화하고 있는 국가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숫자에 있지 않다. 훈장반납이 서훈제도와 실행상의 문제점 뿐 아니라 사회흐름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왜 훈장을 반납할까. 우선 표면적으로만 보자. 훈장을 내놓고 아예 이민을 가버린 김순덕씨는 아들에 대한 속죄와 정부의 사고처리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다른 반납자들의 사유는 돈과 연관돼 있다.

무공수훈자들은 보훈연금을 요구했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연금수혜 대상 범위를 손자녀까지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퇴직교원들은 사립학교를 떠나면서 명예퇴직금을 받지 못한데 대한 항의표시로 훈장을 반납했다.



예우 소홀, 불만의 표출로 반납

훈장은 경제적 지원을 전제로 수여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금전적 지원을 이유로 훈장을 반납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서훈의 주무부서인 행정자치부 상훈담당관실의 한 관계자는 “반납자들이 투쟁의 도구로 훈장을 이용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를 그리 단순히 볼 수 만은 없다.

한림대 정치학과 김용호 교수는 금전적 보상 차원에서만 사태를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교수의 이야기. “훈장반납 풍조는 건국 이래 훈장이 남발돼 훈장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데 큰 원인이 있다. 상징에 걸맞는 예우가 소홀해지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불만과 쉽게 연결돼 훈장반납으로 표출된다.”

김교수는 훈장반납이 급속한 국제화에 따라 ‘국가와 국민이 괴리’되는 사회현상과도 무관치 않다고 강조했다. 이민 등을 통한 국가선택이 자유로워지면서 운명공동체로 국가를 보던 과거의 의식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왜 훈장이 남발됐을까. 전문가들은 훈장이 국가적 차원이 아닌 정략적 차원에서 주어진데 큰 원인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으례히 정권공신들에게 훈장이 수여되는 역대 풍조를 이르는 말이다. 상징이니 만치 훈장에도 분명히 희소성의 원칙이 작용한다. 86년 이래 매년 3,500여개에서 1만2,000여개가 주어졌으니 희소성의 원칙은 실종됐고, 훈장에 부여하는 사회적 가치도 추락할 수 밖에 없다.



정략적으로 '남발', 가치 떨어져

제도 운영상의 문제도 훈장가치 추락에 큰 원인을 제공했다. 상훈법 8조1항의 2는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받은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죄를 범한 자’에게는 훈장을 치탈(박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해당하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일부 신군부 인사들은 훈장을 여전히 갖고 있다. 훈장치탈을 위해서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정략적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 운동 진압으로 훈장이 치탈된 사람은 정호용(당시 특전사령관), 최세창(특전사 여단장)씨 뿐이다.

무공훈장을 비롯한 수훈자 단체에서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공을 세운 사람과 범죄자가 훈장을 공유할 수는 없다는 불만에서다. 상당수 수훈자들은 국민의 정부가 추진중인 광주민주화운동 희생·공로자 서훈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보상 이상으로 국가 이념체계의 혼동에 자괴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훈장을 초개같이 여긴 사람은 외국에도 많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로렌스경은 정부가 주는 훈장을 거부했다. 정부가 우편으로 보내오자 할 수 없이 산책할 때 데리고 다니는 애완견의 목걸이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에게 국가라는 조직체는 구속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렌스의 경우는 최근 한국의 훈장반납 사태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분명한 것은 훈장이 국가통합의 매개체로서 그 존재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훈장반납이 국가와 개인의 괴리를 드러낸다면 훈장제도는 수술이 불가피하다. 제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카카오
배너
2020년 06월 제2830호
  • 이전 보기 배경
    • 2020년 06월 제2830호
    • 2020년 05월 제2829호
    • 2020년 05월 제2828호
    • 2020년 05월 제2827호
    • 2020년 05월 제2826호
    • 2020년 04월 제2825호
    • 2020년 04월 제2824호
    • 2020년 04월 제2823호
    • 2020년 04월 제2822호
    • 2020년 03월 제2821호
  • 이전 보기 배경
저번주 발행호 다음주 발행호
  • 지면보기
  • 구독안내
  • 광고문의
  • * 지면문의
    전화 : 02-6388-8088
    팩스 : 02-2261-3303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 온라인 광고
    전화 : 02-6388-8019
    팩스 : 02-2261-3303
    메일 : adinfo@hankooki.com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많이 본 기사

주간한국 유튜브 채널

서진의 여행 에세이

삼척 초곡항…파도 넘나드는 기암괴석 해변 삼척 초곡항…파도 넘나드는 기암괴석 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