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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금호랑이'와 맞선 하룻강아지

초단짜리 18세 소년은 2차예선에서도 2연승을 더 보태 당당히 본선리그에 입성했다. 바둑가는 웃으면서 소년의 분전을 즐겼다. 역시 낯선 신인이 등장하면 누구나 너그럽게 박수를 쳐주고 그의 장래를 환영 축복해 주는 법이다. 물론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커지면 곧장 비장해지긴 하지만.

본선리그에서도 서봉수는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당연히 바둑가는 비장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저단진이면서도 본선리그에 당차게 올라온 예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리그전에서는 거의 전패를 기록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슬그머니 리그탈락의 고배를 들기 일쑤였다. 따라서 저단돌풍은 대부분 찻잔 속의 태풍으로 머물다 소멸된다.

정동식과 권경언을 꺽을 때 만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보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김수영과 정창현을 꺾자 관철동은 술렁였다. “아니, 이러다 일 나는 것 아냐?”

그도 그럴 것이, 훗날 일류 해설가로 변신하는 김수영이면 당시 조남철의 제자로서 촉망받던 신세대의 선두주자였다. 호방한 기풍에 감각까지 화려했던 김수영은 고정적인 리그멤버로 자리잡고 있던 터였으며 선배들의 틈새를 비집어 도전권을 호시탐탐 노리던 강호였다.

또 정창현은 누군가. 속기파의 거두요, 지독한 독실가로 유명했던 경상도 사나이로 그는 이미 타이틀홀더의 반열에 접어든 절정의 기사였다.

그러나 그까지는 약과였다. 또 한명의 강호 강철민마저 꺽어버리자 관철동은 아예 들끓기 시작했다. 강철민은 이보다 몇달 전‘철권’김인으로부터 최고위를 양도반은 부산의 간판스타로 현역 타이틀홀더.

서봉수가 한판 한판을 둘 때마다 바둑가는 마치 도전기라도 벌이는 양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었다. 당시 초단 신분이면 엄연히 고단진과는 기력차이가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초단이 9단을 척척 이겨버리는 단위무시의 시절이지만 당시는 승단시합 자체도 하나의 타이틀매치인 양 열심히 두던 시절. 따라서 초단이 5단과 제대로 5할 승부를 마크하려면 적어도 정선에는 들어와야하는 정도의 기력차이였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앞으로 인어날 한판에 비하면 조족지혈의 센세이션이었으니, 서봉수의 괴력은 당시로서는 그 끝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정도였다. 이번엔 ‘금호랑이’김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쇠 금(金)자에 호랑이 인(寅)자를 쓰는 김인. 그는 62년 도일(度日)하여 기다니(木谷)문하에서 2년간 바둑수업을 받은 엘리트 유학파의 거두였다. 기다니는 ‘살아있는 기성’오청원(吳淸原)과 함께 1933년 그 유명한 신포석을 개발하여 바둑계의 현대화를 주도한 기념비적인 인물로 이미 수많은 준재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바둑명가의 대부였다. 훗날 그의 제자들이 일본바둑계를 모조리 휩쓸고 다니게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2년간 수도(修道)를 했던 경력. 설사 김인이 2년간 허송세월을 했다고 치더라도 화려무쌍한 세계에서 담금질한 그를 맘놓고 덤빌 수 있는 위인은 없었다. 이미 72년도에 5개 타이틀 중 3개를 허리에 두른 그는 한국바둑계의 철권통치자였다.

김인이 일본서 유학하던 시절, 일본바둑저널은 ‘금(金) 죽(竹) 봉(峰) 트로이카 시대’를 예견하곤 했다. ‘금 죽 봉’은 한중일의 신진기예의 이름 첫자를 따서 부른 용어였다. 김인(金寅)의 ‘금’, 오다케(大竹英雄)의 ‘죽’, 임해봉(林海峰)‘봉’을 뭉친 합성유행어였다.

71년도 막을 연 명인전 리그가 해를 넘겨 72년, 정확히 3월17일이었다. 김인과 서봉수는 도전자결정전에서 만났다. 똑같이 리그전적 5승무패. 여기서 이긴 자는 6승으로 도전자가 될 것이고 5승1패가 된 자는 6승무패로 탈락한 것이나 진배없는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따지고 보면 일년동안 지리하게 기전을 펼치는 이유는 딱 하나, 도전자를 뽑아 도전기를 치르기 위함이다.

3관왕 김인이 서봉수에게 이긴다면 다시 조남철에게 가는 것이고 그것은 김인이 또 하나의 타이틀을 접수하는 그림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김인에게 서봉수는 명인으로 가는 징검다리에 다름 아니었다.



<뉴스와 화제>

20세기 명승부 10선

한국기원에서는 최근, 프로기사 바둑평론가 기자단 등 50명의 바둑전문가의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20세기 명승부 10선을 추천받아 순위를 매겼다.

이 결과 1위는 조훈현과 중국의 네웨이핑 간의 응창기배 결승이 선정되었다.89년 설움받던 한국바둑의 위상을 제고시킨 역사적인 바둑이었다는 데에 많은 전문가들이 거의 만점에 가까운 지지표를 던졌다.

2위는 17세 세계챔프가 된 이창호의 동양증권배 우승으로 93년 대만의 린하이펑과의 대결은 당시 TV로 생중계되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위는 일본의 후지사와 중국의 네웨이핑 간의 제1회 중일 수퍼대항전, 당시 ‘철의 수분장’으로 불리우는 네웨이핑이 무려 6연승을 기록하며 일본바둑을 침몰시킨 대사건이다.

4위는 현재 본지에 소개되는 ‘명인, 명승부’의 주인공 서봉수의 진로배 9연승이 뽑혔다. 한중일간의 단체전으로 치러진 제5회 진로배에서 2번타자로 출격한 서봉수는 남아있던 중국 일본 대표 9인을 모조리 한칼에 뉘어 세계대회 최다연승 신기록을 수립했다. 한편 서봉수는 조남철과의 72년도 명인전도 역사적 바둑으로 뽑히는 행운을 누렸다.

그밖에, 1939년에 있었던 우칭위엔과 기타니의 치수고치기 10번기, 조치훈의 3패후 4연승으로 기성에 오른 바둑, 그리고 휠체어 대국. 본인방 슈사이와 우칭위엔의 특별대국, 조치훈의 80년도 일본명인 등극 등이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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