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세상읽기] 영화‘박하사탕’속의 시간

12/30(목) 11:54

서양의 시간은 선(線)이다. 우리가 흔히 양력이라고 말하는 ‘서기’는 시간을 숫자로 정해 놓았다. 성서에 따르면 그 시간의 시작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고, 그들이 카인과 아벨을 낳고, 긴 세월을 건너뛰어 아브라함이 태어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태복음 1장). 그래서 예수가 태어나고, 서기 1년이 시작되고, 그 이전의 시간은 기원전(BC)으로 다시 선을 이어놓고.

선은 순서요, 질서다. 선은 수학이다. 선은 논리이다. 이 질서와 논리와 수학이 세계의 역사를 지배하고,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 사실 시간에 현재성 숫자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몇시 몇분 몇초라고 할 때 이미 그것은 과거다. 시간이 선일 때 한번 지나간 과거는 다시 돌아 올 수 없다. 되돌아갈 때, 선은 선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반면 도올 김용옥 교수는 EBS ‘알기 쉬운 동양의 고전- 노자와 21세기’강의에서 “동양의 시간은 원”이라고 했다.

우리가 갑자(甲子)라고 했을 때 그 갑자는 60년을 주기로 돌아온다. 원은 순환이고, 윤회이다. 원을 따라가면 거역없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원을 순환하다보면 그 과거도 미래가 된다. 새 밀레니엄의 시간을 여는(2000년 0시 개봉) 한국영화 ‘박하사탕’은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에서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바늘처럼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

그것은 주인공 영호(설경구)란 한 젊은이가 최초로 삶을 바라보던 그 꿈과 희망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 시간을 지나온 자에게는 과거지만 영호가 마지막 서있는 스무살의 지점과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에게는 미래의 출발이다.

마치 영호가 역사와 상황이 한 개인을 내버려두지 않은 폭력과 독재의 미친 시간을 지나왔듯이, 지금 스무살 젊은이들의 미래도 분명 삶의 내용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은 “모든 과거는 지나간 미래”라고 했다.

그러나 영호의 현재와 과거 20년은 선의 시간이 지배하는 사회다. 돌아갈 수 없다. 그 불가항력을 거스르는 일은 기차 선로위를 거꾸로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는 철로 위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며 달려오는 기차에 맞선다.

그때부터 기차는 거꾸로 달린다. 94년 여름으로 가면 아내의 불륜 현장이 나오고, 87년 봄으로 가면 닳고 닳은 형사 영호가 카페 여종업원과 섹스를 하며 첫사랑인 순임(문소리)을 생각한다. 84년 가을 영호는 신참형사로 끔찍한 내면의 폭력공포를 타인에 대한 폭력(고문)으로 표현하고, 80년 5월에 영호는 광주진압군으로 출동해 실수로 여고생을 사살한다. 79년 가을 그 최초의 자리로 가면 그는 소풍을 나와 구로공단 야학동료인 순임에게 박하사탕을 받는다.

스무살의 영호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간을 잡겠다는 것이다. 그때 시간은 멈춤이다. 그 시간의 정지는 그가 광주진압군으로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기차는 역에 멈추어 있다.

‘박하사탕’의 시간은 때문에 단순히 일정하게 움직이는 선이 아니다. 그 시간대의 현재진행과 멈춤에서 인간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어긋남이 영호의 삶이다. 20년전으로 돌아간 영호는 소풍온 강변을 “언제 와 본 것 같다”고 한다. 그 장소는 바로 그가 20년후 철로에서 기차와 맞선 영화의 첫 장소이다. 기시감(旣視感)은 미래예감이다.

시간은 이렇게 순환한다. 선과 숫자로 못박은 새 천년의 시작도 이미 지나온 미래인지도 모른다. 꿈인지도 모른다. 그 꿈을 좋게 만들어야 한다.

이대현·문화부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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