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曹操), 유비(劉備), 손권(孫權)이 패권을 겨뤘던 중국의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전후해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대륙 여기저기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에 대해 인물평 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 많은 인물평중에서도 특히 여남(汝南)사람 허소(許소·召+力)가 그의 사촌형 허정(許靖)과 더불어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매월 ‘버전 업’해 내놓는 ‘월단평(月旦評)’은 가장 권위가 있었다.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 않아 일개 청년에 불과했던 조조가 허소의 명성을 듣고 여남까지 달려가 “나는 어떤 인물입니까”하고 물었다. 허소는 처음에는 조조를 업신여겨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조가 칼날을 들이대고 위협했다.

허소는 한참 동안 조조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당신은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며, 난세(亂世)의 간웅(姦雄)이오”라고 말했다. 즉 평화스런 시대에는 일개 유능한 관리에 불과하지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지략을 발휘해 일세의 간사한 영웅이 될 것이라는 평가였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허소가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똑같은 사람이더라도 태어난 시대가 틀리면 운명도 달라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허소의 인물평을 따른다면 청년시절 갓 결혼한 다른 사람의 신부를 훔치는 등 천하의 난봉꾼이던 조조가 위나라 황제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능력보다는 그가 난세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삼성그룹서 분가, 승승장구 거듭

그렇다면 한국의 재벌그룹중 가장 때를 잘 만난 기업은 어디일까.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겠지만 1997년 삼성그룹에서 분리한뒤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는 제일제당은 ‘시대를 타고 난 기업’중 다섯 손가락안에 꼽힐 것이다. 제일제당은 IMF체제로 ‘양보다는 질’이 우선시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삼성그룹에서 분가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일제당의 1999년 경영실적은 “우리는 ‘온리 원(Only One·오직 하나)’제품만을 만든다”는 제일제당 사람들의 자부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제일제당에 따르면 1999년 한해동안의 추정매출액은 2조3,000억원, 경상이익과 당기순이익은 각각 2,400억원과 1,700억원에 달한다. 제일제당 관계자는 “제일투자신탁증권, 드림라인, CJ-GLS 등 13개 계열사의 순이익까지 감안하면 제일제당그룹 전체로는 5,000억원 이상의 순이익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제일제당이 ‘경쟁력 있는 회사’임을 보여주는 것은 5,000억원을 넘어서는 당기순이익뿐만이 아니다. 제일제당은 기업의 장기적인 경쟁력을 가늠케 해주는 재무안정성과 기술력부문에서도 국내 최고 수준이다.

우선 100%미만으로 떨어진 부채비율. 제일제당은 국제통화기금(IMF) 직전인 1997년말에도 부채비율이 국내 기업중 가장 낮은 수준인 233%에 불과했는데, 지속적인 구조조정으로 1998년에는 124%, 1999년 상반기에는 107%로 하락했다. 실제로 최근 ‘아시아의 200대 기업’을 선정한 홍콩의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제일제당을 한국에서 재무구조가 국민은행, 주택은행, 한국통신, 포항제철 다음으로 좋은 회사라고 평가했다.

제일제당의 기술력 역시 ‘일류수준’이다. 제일제당은 특히 발효와 세파계 항생제 부문에서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장이나 요도감염증 등 광범위한 질병의 치료제이며, 내성(耐性)과 쇼크의 문제를 지닌 페니실린의 대체제인 세파계 항생제의 원료인 ‘7-ACA’의 전세계 시장을 40%이상 점유하고 있다. 또 사료의 반도체로 불리는 라이신과 핵산분야에서도 전세계 수출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99년 의약부문수출실적이 1억1,000만달러에 달했다.


뛰어난 기술력, 장래성 있는 기업구조

제일제당 관계자는 “전자렌지에 2분만 데우면 금방 지은 것과 같은 맛을 내는 즉석밥인 ‘햇반’, 전자렌지용 레토르토 식품인 ‘렌지레또’, 남성조루증 치료제인 ‘SS크림’ 등 제일제당이 만든 ‘온리 원’상품들의 매출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제일제당은 또 장래성 있는 사업구조를 갖고 있다. 우선 최근 ‘인터넷 상거래’의 여파로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물류(物流)’부문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국내 다른 기업의 경우 1,000원짜리 물건을 팔기위해 평균 10원이상의 물류비를 사용해야 하지만 제일제당은 7원의 물류비만 사용하면 된다.

제일제당은 이같은 물류경쟁력을 발판으로 1998년 ‘CJ-GLS’라는 독립법인을 설립, 지난해부터는 농협을 비롯 한국네슬레-한국존스-사조산업 등의 상품을 수수료를 받고 자신들의 물류망을 통해 배달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밖에 1995년 1억3,000만달러를 투자해 스티븐 스필버그와 공동으로 ‘드림웍스’라는 영화사를 설립하는 등 영화업에 진출한 것도 이미지가 중시되는 21세기 경영환경을 겨냥한 포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능력'보다는 '바탕'이 좋았다는 평가도

하지만 제일제당의 이같은 성공을 현재 경영진의 ‘탁월한 능력’으로 결론짓기에는 미흡하다는 의견도 흘러나오고 있다. 우선 제일제당이 자랑하는 낮은 부채비율은 삼성그룹에서 분리하면서 막대한 자산을 갖고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이 평가이다.

실제로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1995년 한국산업증권은 제일제당에 대한 기업분석을 통해 “삼성그룹에서 분리하면서 취득한 30만평에 달하는 보유부동산에 대한 재평가차익 등을 반영하면 부채비율이 125%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제일제당이 보유한 세계적인 기술력과 물류부문의 경쟁력에 대해서도 다른 평가를 내릴 여지가 크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발효와 의학부문에서 제일제당이 갖고 있는 경쟁력의 토대는 1995년 삼성과의 실질적인 분리가 이뤄지기 전에 이미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화관련 분야에 대한 투자도 어느 정도 수익성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요컨대 삼성그룹 분리이후 제일제당이 이룬 경영측면의 성과는 삼성그룹이라는 ‘큰 울타리’안에 속해 있었던 시절의 몫이라는 것이다.

난세라는 시대적 배경을 발판으로 조조가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것처럼, 제일제당 역시 ‘패자부활전’이 없는 21세기 ‘단절의 시대’에 전세계를 휘어잡는 기업이 될 것인지 주목된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