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권하는 사회] 영어를 제2공용어로?

2000 03/22(수) 11:11

영어는 필수, 학원으로 미국으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부쩍 확산되고 있다. 가정과 학교이 조기 유학 열풍에 휩싸이고 유학 알선센터와 영어 학원은 유학 지망생들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국제 교류가 더욱 활발해진 탓에 증권, 투신사 같은 금융업계에서는 영어가 유창한 교포나 유학생 출신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영어 열기에도 불구하고 자격을 갖춘 영어 교사는 태부족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붐에 편승, 영어를 제2공용어로 지정하자고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온통 영어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을 살펴본다.

두 자녀의 아버지인 J모(41) 부장은 요즘 무척 괴롭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집에만 가면 중학 1학년인 큰 딸과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를 해외로 유학보내자는 아내와 말다툼을 하기 일쑤다. 회사에서 바이어들과 상담 때마다 곤욕을 치르는 그로서도 유학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을 먼 객지에 보내자니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물론 빠듯한 살림에 월 300만원에 가까운 체류비와 교육비를 대야하는 것도 부담이다. 그는 큰 아이가 여자인데다 공부도 학교에서 상위권에 들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때나 1~2년 보냈으면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친척 친구 등 주변에서 조기 유학 사례를 많이 접한 아내는 ‘어차피 할 것이라면 일찍 시작하는게 낫다’며 미국에 있는 외가 친척댁에 아이를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J부장도 지난주부터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저녁 회식 자리에서 뜻밖에 다른 부서 부장의 자녀 상당수가 유학을 떠났거나 준비중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회사가 올해부터 추진하는 인터넷 사업부의 외부 영입 사장이 미국 유학생 출신의 30대 초반이라는 사실이 큰 충격을 주었다. 지금 그는 비용 문제를 고려해 캐나다로 보내는 선에서 아이들과 아내를 캐나다로 보내고 자신은 ‘한총련’(한시적으로 총각인, 유학생 자녀를 둔 남성 연합)의 회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


초등학생 상당수가 유학준비중

현재 국내의 영어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1980년대 중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창 달아올랐던 영어 배우기 붐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당시가 단지 외국어의 하나로 영어를 습득하는 차원이었다면 지금은 네이티브 스피커에 버금가는 정도의 실력을 키우는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연령층도 훨씬 내려가 당시 대학생과 직장인이 주를 이뤘던 반면 지금은 초등학생, 더 나아가 만 3~4세의 미취학 아동에 까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상당수 학부모들은 아예 초등학교 2~3학년때 외국 현지로 조기 유학을 보내고 있다.

서울 강남의 A초등학교. 소위 8학군에 속해 있는 이 학교 교실에는 학기 초인데도 한반에 평균 2~3개의 책상이 비어있다.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해외 어학 연수를 갔거나, 아예 자퇴를 하고 조기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말 정부 당국이 올해 3월부터 조기 유학을 허용한다는 취지를 밝히면서 빈 자리가 부쩍 늘어났다. 익명을 요구한 이 학교의 한 선생님은 “지난해 여름 우리 반의 총원 38명중 10명에 가까운 학생이 외국 섬머스쿨을 다녀올 만큼 유학에 대한 학부모의 관심이 높다”며 “현재 상당수가 유학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말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학원들까지 덩달아 쾌재를 부르고 있다. 서울 종로의 J외국어학원은 새벽 6시경부터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간까지 영어 회화를 배우려는 직장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 학원의 한 강사는 “영어 회화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계속 있었지만 IMF 이후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사람과 금융관계에 종사하고 있는 직장인이 더 많아졌다”며 “특히 최근에는 조기 유학 가는 자녀와 함께 외국으로 가려는 주부들이 새롭게 눈에 띄인다”고 설명했다.


영어학원·영어유치원 문전성시

학교나 주택가 인근의 학원도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서울의 웬만한 영어 교습 학원에는 등록하기도 힘들 정도로 수강생이 몰리고 있다. 최근에는 조기 영어 교육 붐이 일면서 취학전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프리 스쿨(Pre-Scool), 즉 영어 유치원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설 영어 교육기관들도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경기도 일산 주엽동에 위치한 귀국학생교육원(원장 김성원)은 이런 국내 영어 열기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곳은 일반 학원과 달리 입학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다. 우선 해외에서 유학을 한 귀국 학생이어야 하며 상당한 영어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귀국한지 오래돼 영어 실력이 떨어지면 입학 허가가 나지 않는다. 입학에 앞서 발음 어휘력 듣기평가 말하기 독해 작문 등 영어 각 분야에 대한 테스트를 실시해 상당한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강사는 전원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교사 자격증을 딴 외국인이나 교포다. 이 학원은 올해 초 문을 열자마자 정원을 마감했으나 아직도 몰려드는 학생과 학부형을 돌려 보내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 학원은 학부형의 요구로 유학을 준비중에 있거나 영어에 빼어나 재능이 있는 수재들을 위해 ‘매스 인 잉글리시’(Math in English)라는 프로그램과 영어 유치부를 일부 신설했는데 이마저 만원을 이룬 상태다.

이 학원의 김성원(44)원장은 “우리 학원은 외국에서 영어를 익힌 학생이 국내에서 지속적으로 영어 실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원생의 회화 실력이 일반 학원보다는 몇 단계 높은 수준에 있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면서 무작정 자녀를 입학시켜달라는 학모형이 찾아와 난감한 실정”이라며 “한편으로 학부형들이 수준높은 영어 교육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조기유학 상담 폭주

영어의 열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또다른 곳은 유학원이다. 요즘 유학원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아르바이트 상담원을 고용하는 등 전에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다.

서울 서초동 강남유학원의 경우 지난해 초 월 6~7명에 그쳤던 해외 유학 성사 건수가 올해는 5배로 늘어나 30명을 상회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초등학생의 조기 유학 상담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늘어나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 유학원의 유민숙(31) 원장은 “최근 해외 유학의 가장 큰 특징은 그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던 중상류층 가정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부유층의 경우 유학 열기는 꾸준히 있어왔지만 이처럼 중상류층의 관심을 보이기는 처음 있는 기현상”이라고 말했다. 유원장은 “심지어는 대기업의 과장인 한 가장은 자식과 아내 유학을 보내기 위해 집을 팔고 전세로 옮긴 경우도 있었다”고 귀뜸했다.

정부는 1997년부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학교 영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영어 배우기 엑소더스’를 막기에는 너무도 힘이 부친다. 실력있는 교사, 그리고 효율적인 학습을 위한 교재와 시설이 학부형의 욕구 수준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영어 열풍, 과연 그것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송영웅·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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