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리호의 최후

흑인 노예의 해방, 그리고 링컨 대통령과 함께 떠오르는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꽤 묵직한 목록을 자랑하게 되었다. 너무나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흑인에 대한 왜곡된 묘사로 비판받고 있는 영화의 아버지 D.W 그리피스의 작품 <국가의 탄생>, 백인만의 전쟁이 아니었음을 일깨워주는 <영광의 깃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토대로 한 쓰라린 영화 <비러브드> 등이 그중 굵직한 영화로 꼽힌다. 이 목록에 추가될 영화는 의외의 영화 <헌리호의 최후:The Hunley>(12세 이용가, 스타맥스 출시)다.

의외의 영화라고 한 것은 당시에 잠수함이 발명되었고 실전에도 쓰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영광의 깃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난 후에 갖게 되는 당혹감과 비슷하다.

<영광의 깃발>은 남북 전쟁이 백인들로만 이루어진 북군과 남군의 전쟁이 아니라 흑인들로만 이루어진 북군 부대도 있었고 이 부대는 노예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젊은 백인 청년이 이끌었으며, 죽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작전 지시에 따라 선두에 섰다 전몰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한다.

존 그레이 감독의 1999년도 TV용 영화 <헌리호의 최후>는 1995년 찰스턴 해안에서 발견된 헌리호 발굴을 계기로 하여 만들어졌다. 헌리호는 남북 전쟁의 막바지 무렵인 1864년, 패색이 짙어가던 남부군이 비밀리에 개발했던 잠수함의 이름이다. 10여명이 겨우 들어가 앉아 손으로 노를 저어야했던 이 원시적인 잠수함은 남부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시험 운전에서 사망자가 속출하자 고철덩어리라는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유서를 써두고 이 시험 잠수함에 승선하여 북군의 거대한 전함을 폭파시키고 장렬하게 전사한 10명의 사나이가 없었다면 잠수함 시대는 더 늦게 왔을지도 모른다고 영화 말미에 나레이션이 흐른다.

영화는 사우스캘로라이나의 찰스턴을 책임지고 있던 보러가스 장군(도날드 서덜랜드), 잠수함의 개발 과정과 참전을 총지휘한 딕슨 중위(아만드 아산테), 잠수함의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한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공학도인 일등 항해사 알렉산더 중위(알렉 제닝스), 그리고 이 시험 잠수함에 승선하여 전몰한 8명의 개성 넘치는 군인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된다.

사나이다운 기백이 넘쳐나는 이들의 성격과 그 성격으로 인한 갖가지 사연은 폭탄이나 터뜨리며 살상 장면을 리얼하게 재현하는 물량 공세의 전쟁물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어서 이들의 고된 훈련이 묘사된다.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노를 저어야 잠수와 부상이 가능하며 산소 공급이 불가능한 심해에서 오래 견디기 등 몸으로 때우는 원시적인 훈련은 단추 하나로 전쟁이 종결되는 현대전의 입장에서 보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숨막히는 적진 공격과 예기되었던 사고, 그리고 가슴 뭉클한 전사 장면. 이렇게 인간적인 전쟁이 130여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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