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어디로 가나] 천수이벤, 역경딛고 총통에 오르기까지

2000 03/29(수) 22:03

반세기만의 정권교체라는 역사적인 드라마에는 으례 감동적인 뒷얘기들이 있게 마련이다. 대만 총통 선거에서 대권을 거머쥔 천수이볜(陳水扁)당선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사에서 드러난 애절한 순애보와 도전 정신, 무수한 역경을 이겨낸 불굴의 의지는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소작농과 여공의 아들로 태어나 오직 머리와 노력만으로 ‘작은 경제대국’ 대만의 최고 통치자가 되기 까지, 그의 지난날은 한편의 인간승리 드라마다.


휠체어 사랑이 가져다 준 영광

대만 총통선거가 끝난 3월18일 밤 타이베이 시내에서 열린 당선 축하행사장. 20만명의 군중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는 동안에도 천 당선자 옆 휠체어 여인의 표정은 언제나 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천 당선자의 승리를 계기로 전세계 뉴스의 촛점이 된 부인 우수전(吳淑珍·48)여사가 바로 이사람.

우 여사가 천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다. 타이난(臺南) 마터우(麻豆)의 쩡원(曾文)중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랑의 대학에서 다시 만나면서 부터 싹텄다. 우는 중싱(中興)대에 입학한 직후 중학교 동창회에 나갔다가 우연히 국립 대만대 법학과에 다니던 천을 다시 만났다. 그는 ‘머리’밖에 없고 어딘지 촌스럽지만 성실하고 총명한 천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곧 반대에 부딪혔다. 부유한 치과 의사였던 아버지가 가난한 수재에게 호락호락 딸을 내줄 리가 없었다. 결국 우는 사랑을 위해 집을 뛰쳐 나왔고 1975년 결혼했다. 하객은 7개 테이블밖에 안됐고 예물은 4만원짜리 반지가 전부였다.

1979년 천이 대망을 품고 험난한 정치판에 뛰어들자 걱정도 됐지만 결혼후 10년간은 그래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딸 싱위(23)과 아들 쯔중(19)도 태어났다.

그러나 1985년 11월18일 타이난 현장(縣長)선거에 나선 남편의 선거운동을 돕던 우는 갑작스레 달려든 트럭에 치여 두다리가 마비됐다. 목뼈가 30여개 파편으로 조각났고, 두 차례 대수술끝에 목숨은 건졌으나 신체의 온도조절 기능을 상실한 중증 장애인이 돼 버린 것이다. 당시 트럭은 일단 비켜선 그를 지나쳐 간뒤 U턴, 다시 덮침으로써 ‘정치테러’였다는 게 정설이다.

이로 인해 천은 “나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됐다”며 평생 미안해 하게 된다. 대권의 영광을 제일 먼저 아내에게 돌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하지만 우여사는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며 선거때마다 휠체어를 탄채 유세장을 찾아 지지를 호소했다. 천은 요즘도 매일 밤 두 번씩 깬다고 한다. 아내를 안고 화장실에 데려다주기 위해서란다.


가난한 수재에서 조용한 민주투사로

천 당선자는 대만에서 서민의 대표로 흔히 ‘대만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대중연설이 탁월하지만 원래는 정의감은 있으되 부끄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조용한 투사’라는 표현을 자주 쓰기도 한다.

그는 1951년 2월 남서부 타이난현의 허름한 토담집에서 태어났다. 소작농과 방적공장 여공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난 때문에 점심을 거르기 예사였다. 공부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한 그는 초등학교를 전국 1등으로 졸업했다.

1969년 국립 대만대에 입학한 후에도 3학년 재학중 최우수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유명 해상법 전문회사에 들어간 그는 당시만 해도 정치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979년 반체제 운동과 관련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그의 인생이 바뀐다. 당시 피고인 중 한사람이 바로 이번 총통선거에서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뤼슈롄(呂秀蓮). 변론을 맡는 동안 천 자신도 민주투사로 변신한 것이다.

이후 그는 정치에 본격 입문, 1981년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이 됐다. 1985년 펑라이다오(蓬萊島)라는 반체제 잡지 제작에 참여한 혐의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1989년과 1992년 입법의원 선거에 연속 당선되는 등 비교적 순탄한 정치행보를 걸었다.

특히 1994년 12월 43세로 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되면서 천은 차세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열정적으로 주민 서비스에 힘쓰며 고 장제스(蔣介石)총통의 저택 택지 일부가 시유지인 점을 들어 반환을 요구하는 등 원칙론자로도 이름을 날렸다.

반면 퇴폐 이발소와 매춘등 ‘8대 업소(八大行業)’일소 정책은 기득권층을 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들은 국민당과 단결해 1998년 타이베이 시장선거에서 그의 재선을 막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를 총통선거에 도전하게 만든 셈이 됐다.

지한파, 혹은 친한파로 알려진 그는 1999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경남대와 용인대 등 한국의 2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윤오·국제부기자 yo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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