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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먹고사는 우리시대의 마지막 광대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 수준의 동춘서커스단, 재미없다면, 웃지 못했다면 입장료 반환해드립니다. 자, 보러오세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정역 앞의 공터. 삐에로 옷처럼 울긋불긋한 무늬의 높다란 천막이 서 있고 그 앞에는 흥겨운 북 장단과 섹소폰 반주에 맞춘 ‘닐리리 맘보’, ‘댄서의 순정’과 같은 구성진 트로트 가락이 흐른다. 입구에는 박제된 코끼리와 1960년대 무성영화에나 나올 듯한 곡예 도구들이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다. 한편에서는 작은 원숭이들이 재롱을 피우며 관객을 유혹하고 있다.

입장료는 일반 7,500원, 학생 5,000원, 소인 3,000원. 그러나 평일 낮 공연이어선지 제 돈을 내고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인근에서 나눠주는 일반 5,000원짜리 할인권(여기서는 ‘약반액 초대권’이라고 칭함)을 들고 입장했다.

오후 2시 정각 ‘깜짝쇼 카니 홍’의 마술 묘기로 동춘 서커스의 막이 올랐다. 붉은색 연미복에 검은 모자를 쓴 마술사 홍승호(56·동춘서커스부단장)씨는 빈 깡통에서 사탕과 과자가 나오는 마술을 선보인 뒤 관객에게 과자를 던져주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화려한 의상의 곡예사와 흥겨운 가락, 관객의 박수소리로 서커스는 시작됐다.


무대위 열기와 달리 객석은 썰렁

300평 남짓한 공연 천막 안에는 무대가 맨 앞에 놓여있었고 뒷편에는 음료수와 라면 과자 등을 파는 간이매점이 설치돼 있었다.

입장 관객은 약 40여명. 코흘리개를 안은 20대 후반의 주부에서 30~40대의 중년신사, 단체로 구경나온 50대 아주머니들, 그리고 재롱둥이 손자를 데리고 나온 노부부에 이르기까지 관객층은 다양했다. 몇몇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공연은 아랑곳 않고 문밖의 원숭이에게 과자를 던져 주는데에만 온통 빠져 있었다. 처음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는 곡예사들이 펼치는 묘기에 열이 붙으면서 점차 박수와 환호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서커스 공연은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었다. 공중그네타기, 사각통에 들어가기, 발로 나무통 돌리기, 의자탑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외발자전거 묘기, 줄타기, 원숭이 묘기, 불쇼 등…. 한차례 소동(?)도 일어났다.

강아지 원통 굴리기 묘기를 하던 도중 강아지들이 원통을 멈추지 못해 그만 통속에 있는 강아지 한마리가 통과 같이 무대 밖으로 떨어진 것. 공연을 주관하던 김영희 곡예사가 재빨리 놀란 강아지를 달래며 상황을 수습, 관객들의 또한차례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렇게 2시간여 동안 계속된 서커스는 공중 묘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현재 국내에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서커스단은 동춘, 비룡, 대우 등 단 3곳. 1960년대 전성기를 누렸을 무렵에는 무려 18개의 대형 곡예단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펼쳤으나 이제는 동춘을 제외하곤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에 있다.


한때는 대중스타 양성소

1926년 창단, 만 74년의 최고 역사를 지닌 동춘서커스단은 1970년대 초까지 만해도 단원이 200명을 넘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황해 백설희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이주일 심철호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 등이 모두 동춘 무대를 통해 성장한 스타다. 당시 동춘의 명칭은 서커스단이 아닌 ‘동춘연예단’이었다. 그때만 해도 곡예단 외에는 이렇다할 대중 예술을 접할 기회가 없던 터라 서민 사이에 이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당시 동춘연예단의 공연은 크게 3종류로 나눠져 있었다. 신파극 형식의 연극 1시간, 가수와 무희들이 등장하는 쇼 1시간, 그리고 서커스 묘기 1시간으로 나눠져 공연됐다. 또 공연 앞뒤에 남사당 패거리나 사물놀이 풍물패 등의 공연이 곁들여져 한편의 종합 버라이어티 쇼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동춘서커스단 박세환(58) 단장은 “당시 지방 공연을 다니다 보면 엄동설한 한겨울에 한 가족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공연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곡예사나 가수들은 지금 TV 스타보다도 훨씬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며 “당시 곡예단은 단지 쇼만을 보여주는 연예인이 아닌, 한국 대중 예술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무대에 섰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홍승호 부단장(56)도 “서커스단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을 당시 한번 공연을 끝내고 나면 매표소에 있는 부대 자루에 돈이 가득 넘쳐흘러 주체를 못할 정도였다. 또 동네에 나가면 젊은 처자들이 새벽부터 나와 곡예사들을 보려고 난리를 칠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고 말했다.


유흥업소로 자리옮기는 곡예사

현재 동춘서커스단의 단원은 채 40명이 안될 정도로 예전에 비해 크게 위축돼 있다. 인기가 전과 같지 않자 고난도 기술을 가진 곡예사들이 수입이 좋은 유흥업소 쪽으로 대거 이동했기 때문이다.

한달 단위로 지방을 옮겨가면 객지 생활을 해야하는 어려움, 거기에 수입도 별로 신통치 않자 많은 곡예사들이 하나둘씩 서커스단을 떠나가고 있다. 이날 공연에도 8~9명의 곡예사가 무려 20여개 종류의 각종 묘기를 번갈아 맡아 했다.

현재 동춘서커스단의 단원은 모두 월급제로 운영된다. 여러 고난도 묘기에 겹치기 출연하는 최고 수준급 곡예사의 월급은 보통 400만~500만원 수준. 아무리 적어도 월 200만원 이상씩은 받는다. 곡예사들은 월급 외에도 성과급으로 하루 1만~3만원의 수당을 추가로 받는다. 물론 성과급은 관객이 어느 정도 수준은 차야 지급된다. 서커스단측은 이런 높은 월급을 지급하면서도 대를 이을 곡예사들이 나타나지 않아 애로를 겪고 있다.

극단의 이동은 한달 단위로 정해진다. 주로 수도권이나 6대 대도시를 도는데 한번 터를 잡으면 한달간 체류하면서 공연을 펼친다. 워낙 이동 장비가 많아 한번 장소를 옮기는데만 임대료를 포함해 7,000만~8,000만원이 소요된다. 대형 천막과 공중그네 설치비, 곡예사 숙박용 컨테이너 이전비 등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든다.

또 이전하다가 장비가 파손되는 경우도 많아 연간 장비 교체 비용만 3억원이 든다고 서커스단 관계자는 귀뜸했다.

관객은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주말 4회 공연을 하면 4,000~5,000명의 관객이 모인다. 관객은 서커스단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40~50대 중년과 어린이, 주부, 노인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동춘서커스 입장 담당인 박규환씨는 “과거만은 못하지만 아직까지 관객이 없어서 공연을 못하는 정도는 아니다. 가장 힘든 것은 실력있는 곡예사를 구하는 일이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국내에 서커스가 처음 도입된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 중반 무렵. 당시 일찌감치 서양 문물을 받아 들였던 일본을 통해 국내에 서커스라는 형식의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소개돼 들어왔다. 출범 초창기에는 서커스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연예단 성격이 짙었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은 연극 형식의 신파극이었고 여기에 가수들의 쇼무대와 마술사 곡예사들의 묘기가 부수적으로 따라붙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부터 영화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연극 부분인 신파극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1980년대부터 TV가 급속히 보급되고 유흥업소도 활성화하면서 쇼 프로그램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그러면서 서커스단은 묘기를 부리는 곡예단 중심으로 특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실시되는 서커스단의 각종 묘기는 상당 부분 독일에서 만들어져 일본과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전수된 기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금도 서커스단에서 실시하고 있는 외줄타기나, 칼춤 같은 곡예는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전통 무예중 하나다.


태풍으로 천막 다 날라가기도

창단 이후 동춘서커스단이 가장 위기를 맞은 때는 태풍 ‘셀마’가 전국을 강타한 1987년 여름. 당시 전남 강진서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밤새 강풍에 천막과 장비들이 모두 날아가버린 것. 놀란 단원들은 모두 혼비백산하고 공연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박세환 단장은 강진 시내에서 기술자들을 불러모아 10일만에 공연장을 다시 세우는 순발력을 발휘해 위기를 넘겼다. 또 1983년 1월 동춘서커스단의 최고 인기 스타였던 코끼리가 사망한 것도 잊지 못할 일이다.

당시 전남 광주에서 공연중이었는데 전날 영하 1도였던 기온이 밤새 영하 17도까지 급강하하는 바람에 코끼리가 그만 동사하고 말았다. 단원들은 코끼리를 인근 산에 묻고 돌아왔으나 하도 아쉬워 이듬해 봄에 다시 땅을 파헤쳐 코끼리를 꺼낸 뒤 박제를 했다. 지금 공연장 입구에 서 있는 박제 코끼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현대 사회에서 서커스는 박물관의 오래된 골동품처럼 추억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우리의 향수가 남아 있는 한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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