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부동 양당구도 구축, 영·호남 싹쓸이 여전

13일 자정이 아직 한참 남은 시간. 개표가 한창 진행중이었지만 TV 앞에 앉은 유권자의 관심은 일찌감치 지역구가 아니라 전국 판세로 넘어가 있었다. 개표 초반부터 영남은 한나라당, 호남은 민주당 후보가 거의 싹쓸이한 상태에서 요지부동의 우세를 지켜나가고 있었다.

영·호남 지역구도는 16대 총선에서도 결코 깨지지 않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상대 지역에서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호남지역 득표율은 광주 3.3%, 전·남북이 각각 4.2%, 3.5%였다. 민주당은 부산에서 14.7%, 대구 11.8%, 경남·북에서 각각 12%, 14%를 얻는데 그쳤다. 15대 총선 당시 국민회의의 득표율이 부산 6.3%, 대구 1.4%였던 점을 감안하면 지역구도가 다소 완화됐다는 설명이 나올 법 하다.

정반대로 지역감정이 더 고착됐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15대 당시 신한국당이 광주에서 7.4%, 전·남북에서 각각 17.6%, 23.4%를 얻은데 비해 이번에 한나라당은 전 지역에서 5%대 밑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소속이 영남에서 1석, 호남에서 4석 나왔다는 사실도 위안은 못된다. 호남지역 무소속 당선자들이 유세기간중 한결같이 ‘당선후 민주당 입당’ 공약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지역구도에 대한 대항세력이나 독자노선이 아니라 지역정서를 기반으로 한 인물론에 의지해 당선됐다는 이야기다.


자민련 쑥밭 민국당 궤멸

한나라, 민주 양당이 거추장스러운 자민련과 민국당을 따돌리기 위해 매진했던 전략은 선거를 ‘양당구도’로 몰고가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자민련은 쑥밭이 되고, 민국당은 궤멸했다. 민국당이 꿈꾸었던 4당구도는 물론이고 자민련이 집착했던 3당 정립구도 역시 물거품이 됐다. 민국당은 지역구도와 양당구도의 십자포화를 맞고 침몰했다.

총선 사흘전 발표된 남북정상회담 합의는 오히려 영남지역 유권자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약체의 민국당보다는 강한 한나라당을 집중지원해 DJ정권에 대항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경북에서 김윤환, 이수성 후보가 깨지고 부산에서 이기택, 박찬종, 김광일 후보 등이 줄줄이 떨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민주당의 김중권(경북 울진·봉화), 노무현(부산 북·강서을) 후보가 분루를 삼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영남권을 차기대선의 교두보로 여겼다면 이인제 민주당 선대위원장은 충청권을 대권도전의 시험장으로 삼았다. ‘이회창 바람’과 ‘이인제 바람’이 기류변화를 일으키면서 자민련은 된서리를 맞았다.

기존 대구·경북지역 현역의원이 추풍낙엽이 됐고 충청권에서도 반타작을 하지 못했다. 자민련이 대전과 충·남북에서 건진 의석은 11석. 15대에 비해 13석이 줄었다. 민주당이 8석을 가져가고 신한국당이 4석을 가져가 충청권은 ‘3분 천하’의 형세가 됐다. 충청권이 지역구도에서 이탈했다는 것이 16대 총선의 의미라면 의미다.


박빙지역 속출, 천당·지옥 오가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견고한 텃밭을 배경으로 수도권과 충청, 강원지역에서 대혈전을 벌였다. 덕분에 한표를 다투는 초경합, 박빙지역이 속출했다. 100표차 이내로 승패가 결정된 곳이 4개나 됐고 1,000표 이하에서 당락이 갈린 선거구가 15개에 달했다. 이중 13곳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이겼다.

경기 광주의 한나라당 박혁규 후보는 불과 3표차로 민주당 문학진 후보를 눌러 개표완료 때까지 지옥을 서너번 갔다왔다. 한나라당 김영구 의원(서울 동대문을)은 민주당의 386 대표주자 허인회 후보를 맞아 11표차로 간신히 6선에 성공했다.

한나라당 신경식 후보는 충북 청원에서 자민련 오효진 후보를 16표차로 따돌렸다. 경북 봉화·울진에서 승리를 장담했던 민주당 김중권 전청와대비서실장은 오히려 한나라당 김광원 의원에게 19표차로 무릎을 꿇었다. 한나라당 중진 서청원 의원은 서울 동작갑에서 민주당 386세대 이승엽 후보에게 146표로 아찔하게 이기면서 ‘젊은 피’의 파워를 절감했다.

16대 총선 최대수확 중 하나는 386세대 돌풍과 세대교체. 15대 총선에서 7명에 그쳤던 30대 당선자가 13명으로 늘었다. 한나라당이 6명, 민주당은 7명의 ‘젊은 피’를 수혈했다.

한나라당은 원희룡(36·서울 양천갑), 오세훈(39·서울 강남을), 김영춘(39·서울 광진갑), 박종희(39·수원 장안), 윤경식(38·충북 청주 흥덕) 당선자가 그 주인공들. 민주당에서는 전대협의장 출신의 임종석(33·서울 성동) 후보가 16대 최연소로 당선된 것을 비롯해 김성호(38·서울 강서을), 장성민(36·서울 금천), 송영길(37·인천 계양) 후보 등이 당선됐다.


박빙지역 속출, 천당·지옥 오가

이들은 재선에 성공한 한나라당 남경필(35) 의원 및 민주당 김민석(35), 원유철(37) 의원 등과 30대 파워를 형성하게 된다. 이번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386세대는 모두 137명. 당선비율은 10%에 불과하지만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유권자의 정치판 물갈이 염원을 반영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지역, 양당 대립구도속에 무소속과 진보정당이 끼여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번 총선에서 무소속 당선자는 고작 5명. 14, 15대 총선에서 각각 21명과 16명이 당선돼 정계개편의 중요 변수가 됐던데 비하면 옹색하기 이를데 없다.

무소속 당선자는 강운태(광주 남), 이강래(전북 남원·순창), 박주선(전남 보성·화순), 이정일(전남 해남·진도), 정몽준(울산 동) 후보. 이들중 호남지역 4명은 민주당에 입당할 것으로 보여 실질적인 무소속은 정몽준 의원 1명에 불과하다.

5·16 쿠데타 이후 최초로 진보정당의 원내진입을 꿈꾸었던 민주노동당이 전멸한 것도 양당구도의 직접적 소산이다. ‘아래로부터의 공천’실험을 통해 21명이 출전한 민주노동당은 최용규(울산 북) 후보 1명이 싸움다운 싸움을 한번 해본데 만족해야 했다.

서울 등에서 46명이 출마한 청년진보당 역시 몰패를 당해 현실정치의 벽을 실감했다. 청년진보당은 하지만 지역구 평균득표율 3-5%를 기록해 진보정치 세력의 존재와 필요성을 알렸다는 점은 성과라고 자평했다.


탈당파 등 ‘철새’ 고전, 여성 약진

탈당·영입파가 대거 낙선하고 여성의원이 약진한 것은 16대 총선의 주요 특징이다. DJ정권 출범후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긴 의원은 18명. 여기다 국민신당 출신을 합하면 국민회의 영입파 의원은 23명에 이른다.

이중 17명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생존자는 김명섭(서울 영등포갑), 유용태(서울 동작을), 원유철(경기 평택갑), 박종우(경기 김포), 송훈석(강원 속초·고성·양양·인제), 이용삼(철원·화천·양구) 의원 등 6명 뿐이다. 한나라당에서 자민련으로 말을 갈아탄 이상현, 이택석, 백남치, 오세응 의원이 낙마했고 민주당에서 자민련으로 옮긴 정한용 의원도 떨어졌다.

한나라당을 탈당해 무소속 출마한 홍문종, 황학수 의원도 나란히 고배를 마셨다. 탈당·영입파의 성적이 저조한 것은 ‘철새 정치인’이란 낙인과 총선시민연대의 공격표적이 된 까닭도 적지 않다.

여성의원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16명이 당선돼 15대에 비해 7명이 늘었다. 지역구 당선자도 15대의 3명에서 5명으로 늘었다. 민주당의 추미애(서울 광진을), 장영신(서울 구로을), 김희선(서울 동대문갑), 김경천(광주동) 후보와 한나라당 박근혜(대구 달성) 의원이 그들이다. 이중 추미애, 박근혜 의원은 재선의 영광을 안았다.

전국구 여성 당선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5명이고 민국당이 1명이다. 여성의원의 약진은 독자적 전투력에 힘입었다기 보다는 시민·여성단체의 ‘비례대표 우선순위 30% 할당’요구에 따른 것이라 만족하기는 어렵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4/20 22:07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