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치명타, 5· 6 공 세력 몰락

말 없는 다수, 그들의 심판은 냉혹했다. 이번 총선은 총을 앞세워 의사당에 ‘유혈 입성’한 비정상적 태생의 정치세력 퇴출과 한국 근대 정치사에 40년 아성을 구축해온 3김 체제의 와해 조짐이라는 두 갈래로 압축할 수 있다.

특히 ‘국민의 정부’에서 공동 정권의 한 축을 형성해 온 김종필(JP) 자민련 명예총재의 몰락은 앞으로 김대중 대통령 집권 말기의 정치 구도에서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김 명예총재는 이번 총선에서 강원과 경기 지역에서의 완패, 그리고 믿었던 충청권에서조차 지역구 11석을 확보하는데 그침으로써 정치적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

지금까지 국내 정치의 특성이 지역 정서를 기반으로 존립해왔다고 볼 때 JP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종착점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이번 총선 패배가 ‘새천년민주당 이인제 선대위원장의 충청권 바람에 밀린 탓’이라는 안팎의 평가가 내려지면서 JP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도 못하는 상황에서 JP로서는 민주당과의 ‘공동정권 재가동’ 이라는 카드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내각제 포기는 물론이고 공동정권내에서의 위상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총선을 계기로 민주당 내에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한 이인제 선대위원장과의 껄끄러운 관계도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격변의 정치판 헤쳐온 JP 존립위기

그러나 일부에서는 한국의 격변기 40여년을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JP가 존립을 위한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간 JP의 정치 역정을 살펴볼 때 충분히 재기할 수 있을 능력과 경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JP는 1961년 5·16 쿠데타의 주동 세력으로 정계에 입문,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면서 2인자로서 정치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했다. 그러다 1980년대초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정치적 탄압과 규제에 묶여 처음으로 고초를 겪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민주공화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35석을 확보, 정치적으로 다시 일어서는데 성공했다.

이 여세를 몰아 그는 13대 국회에서 자신의 신민주공화당과 여당인 민정당, 그리고 김영삼 전대통령이 이끄는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을 하나로 묶는 역사에 유례가 없는 3당 합당을 이끌어내 정계 주류에 등극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4대 총선에서 공화계가 패하는 아픔을 맛보며 또다시 정치적 칩거에 들어갔다. 1995년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팽(烹)을 당한 JP는 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깃발을 내걸고 50석을 확보, 또다시 오뚜기처럼 재기하는 정치 9단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 공조를 하며 두번째 국무총리에까지 오르는 제2의 정치 황금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JP의 정치경력으로 돌아볼 때 어떤 형태로든 또한차례 그의 정치력이 발휘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이 예전에 비해 JP로서는 휠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은 분명하다.


3김퇴조와 차기주자들의 침몰

JP 외에 남은 2김 체제의 균열 양상도 역력했다. 우선 부산 지역에서 민국당의 참패는 YS로 대변되는 기존의 부산 정서가 이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물론 YS가 민국당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YS의 직계인 김광일(부산서구) 전청와대비서실장과 문정수(부산북강서을) 전부산시장 등이 각각 한나라당 정문화, 허태열 후보에게 힘없이 주저앉은 것은 이런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또 ‘전라 공화국’이라고까지 불렸던 호남지역에서도 민주당이 4석을 무소속에 내준 것도 DJ의 영향력이 전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증명해줬다.

이런 3김 퇴조와 함께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또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5공 세력, 즉 민정계의 몰락이다. 1990년의 3당 합당 후 1992년에 있은 14대 총선에서 공화계가 전멸했듯 이번 총선에서는 12·12 쿠데타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민정계 인사들이 여야 할 것없이 대거 퇴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우선 한나라당에서 4선의 이세기, 3선의 이해구 전의원이 386후보인 민주당 임종석, 심규섭 후보에게 일격을 당했고 5선의 양정규 전의원과 4선의 김중위 전위원도 의사당 재진입에 실패했다.

특히 민정계중 차기 대권 후보를 꿈꿨던 민주당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김중권 전대통령비서실장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을 비롯해 자민련 박철언 전의원과 민국당 김윤환 의원 등 포스트 대권 주자를 노렸던 여야 중진들이 정치 생명에 타격을 받게 됐다. 이밖에 권정달, 박준병, 박범진, 김현욱, 이긍규, 허화평, 이정무 등 민정계의 예전 실세들이 줄줄이 탈락의 쓴 맛을 봐야 했다.

이들 5공 세력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여야 각당에 흩어지면서 뚜렷한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고 있지 못한데다 지역적 기반도 약해 이번 총선을 끝으로 정치적 생명이 다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현재 민정계 중진중에는 경기 연천·포천의 이한동 자민련 총재와 서울 동대문을의 한나라당 김영구 의원만이 살아남은 형국이 됐다.


명실상부한‘문민시대’개막

4·13 총선에서는 이밖에도 노태우 정권과 YS 정권의 실세중 상당수가 신인에 밀려 탈락, 정치적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북 칠곡에서 서울법대 제자인 한나라당 이인기 후보에게 덜미를 잡힌 이수성 전민주평통부의장과 민국당의 이기택(부산 연제) 전의원, 박찬종(부산 중·동구) 전의원, 서석재 전의원 등은 차기 대권 후보자들이면서도 고비를 마셔 앞으로 정치적 입장이 불투명해졌다.

현 정권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눈물을 흘린 중견도 즐비하다. 김봉호 국회부의장, 강봉균 전재경장관, 김정길 전 청와대정무수석, 노무현 전부총재, 장을병 전의원, 한영애 전의원 등은 당차원의 집중 지원을 받고서도 떨어져 DJ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같은 점에서 볼 때 이번 총선은 비로소 우리 정치권에서 ‘군사 쿠데타 세력’을 쓸어내고 명실상부한 ‘문민정치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의 ‘바꿔 바꿔’가 주된 선거의 모토였던 이번 총선은 영·호남 지역구도의 강화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그간 고여 있던 썩은 물을 밖으로 빼내는 순기능도 일정 부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0/04/20 22:17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