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 아군도 없다. 먹이감이 되지 않으려면 먹어야 한다.”

세계 자동차업계에 휘몰아치고 있는 인수·합병(M&A) 바람이 이제는 생존을 위한 절대절명의 명제로 떠올랐다. 비용절감, 기술제휴의 수준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장을 쟁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의 법칙이 시작된 것이다.

1998년 독일 다임러벤츠의 미국 제3대 자동차메이저 크라이슬러 인수를 시작으로 불어닥친 인수바람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시장을 넘나들며 거침없이 불어닥치고 있다. 메이저간 합종연횡은 물론 메이저-마이너 업체간의 ‘몸집 불리기’도 점입가경이다.


급변하는 세계시장

업체의 인수합병 바람에는 공급과잉 외에도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기술비용이 한몫 했다. 특히 오염도가 낮은 엔진, 휘발유 이외의 대체연료 개발비용때문에 메이저 업체와의 합병을 대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1950년대 이후 1마일당 4g으로 규정돼 있던 오염물질 배출 규제 기준을 최근 0.07g으로 대폭 강화했다. 일류 메이저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장환경이 마이너 업체의 목줄을 죄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가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삼는 것은 연간 생산능력 400만대 이상. 이 정도의 생산능력은 갖춰야 이른바 ‘글로벌 6’에 진입해 기술개발비 등 앞으로 예상되는 천문학적 재원마련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의 자동차 생산능력은 2002년까지 연 7,000만대로 예상된다. 그러나 수요는 6,000만대에 머물고 있다. 1,000만대가 과잉인만큼 그만큼의 업체가 도태돼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기에 신규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아시아와 남미 등 신흥시장에 대한 미·유럽 메이저 업체의 무차별 자본공세도 적자생존의 인수·합병을 부채질하고 있다.


덩치를 키워라

합종연횡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지난달 일본 미쓰비시(三菱) 자동차의 지분 34%를 20억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계약대로라면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미쓰비시의 최대주주로 부상하게 되며 생산면에서도 연 550만대로 일본 도요타자동차를 제치고 미 제너럴 모터스(GM), 포드에 이어 세계 3위의 자동차 업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유럽 자동차 업계에서는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프랑스 푸조도 인수할 것이라는 전망이 강력히 거론되고 있다.

올해초 스웨덴 사브의 지분 전량을 인수, 오펠(독일), 복스홀(영국)을 포함, 유럽 3개 회사 경영권을 거머쥔 GM은 지난 2월 101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1위, 세계 7위 업체 피아트 지분 20%에 대한 인수협상도 마무리지었다. 유럽시장에서 최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피아트가 GM과 손잡은 것은 ‘시장확보’와 ‘생산비 절감’측면에서 불가피한 선택. 60%에서 39%까지 급감한 자국내 점유율, 유럽내에서도 11%에 불과해 다른 업체와의 제휴는 절실한 과제였다.

1983년부터 이미 미국시장에서 피아트라는 브랜드를 포기해야 했던 피아트는 이로써 미국에 다시 이름을 내걸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뿐 아니라 추가로 합의한 GM과의 공동생산·공동구매로 3년후면 연 12억달러에 달하는 생산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피아트는 나머지 80%의 지분도 앞으로 3년내 주주들의 결정에 따라 GM에 넘겨주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양사의 완전통합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독일 BMW를 놓고 GM, 독일 폴크스바겐 등과 치열한 3파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포드는 지난달 BMW의 랜드로버 부문을 29억달러에 사들이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재규어, 애스톤 마틴을 사들인 바 있는 포드는 지난해에도 스웨덴 볼보의 승용차부문과 일본 마쓰이(三井)를 합병, 세계시장의 16.8%를 점유하는, 명실상부한 GM의 최대 라이벌로 부상했다. GM,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등의 미국 업체가 인수합병의 방법을 선호하는 반면, 폴크스바겐, 도요타, 혼다 등은 기존 계열관계 또는 자사 핵심역량 강화에 경쟁력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먹이감으로 거론되는 국내업체

지난해 3월 일본 닛산자동차와 자본제휴를 맺은 프랑스 르노는 한국의 삼성자동차 인수를 놓고 막판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태. 대우자동차 인수에는 가장 유력한 후보를 알려진 GM을 비롯,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등이 입찰의향서를 제출하는 등 한국 업체들이 세계 메이저업체의 ‘먹이감’에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미쓰비시의 최대주주로 부상하면서 1972년부터 미쓰비시와 기술·자본제휴를 하고 있는 현대의 제휴 파트너가 될 것이란 전망도 구체성을 더하고 있다.

이와 관련, 위르겐 슈렘프 다임러크라이슬러 회장은 지난 3월30일자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현대자동차와 소규모 제휴를 위한 협상을 추진중”이라고 밝혀 이같은 추측을 뒷받침했다.

현대차와 제휴가 성사되면 연료전지 등 차세대 구동장치 개발이나 교환판매 등이 다임러 크라이슬러와의 주 관심분야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대와 손잡고 대우차 인수전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왜 아시아시장인가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업체들이 전에 없이 한국·일본업체 ‘공략’에 열을 올리는 것은 아시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공급기지로서 양국의 활용도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시장은 6,000만대의 신규 수요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을 비롯,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를 중심으로 향후 10년간 1억만대라는 천문학적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적고 노동력과 기초기술 등 현지생산에 필요한 인프라가 잘 구축된 한국, 일본에 메이저 업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동차 업체 구조조정 과정에서 헐값에 나온 매물이 이들 업체의 구미를 당긴 것은 물론이다.

황유석 국제부기자

입력시간 2000/04/2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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