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양당구도에 밀렸지만 가능성 확인

진보정당의 맏형을 자처하던 민주노동당이 16대 총선에서 끝내 원내진출의 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1992년 총선때 민중당의 간판으로 기성 정치권에 도전한 이래 두번째 고배를 마셨다.

정치개혁을 전면에 내세웠던 청년진보당 역시 한석도 얻지 못했다. 양당은 모두 이번 총선에서 득표율이 총유효투표수의 2%에 미달해 4월17일자로 정당등록이 취소됐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의 정치실험은 실패했는가.

민노당의 대답은 “결코 아니다”다. 민노당은 정당등록이 취소된 이튿날 전국 지부장단 회의를 열었다. 16대 총선의 성과와 문제를 짚어보고 향후 진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결론은 “계속 나아가자”였다.

4월28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본격적으로 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나아가 6월8일 지방 보궐선거와 2002년 지방선거에 다수 후보를 내고 4년뒤인 17대 총선에서는 진면목을 보이기로 방침을 정했다. 김종철 부대변인은 “당분간 미등록 정당의 형태로 유지하다 적당한 시점에서 현재의 골격을 유지하는 체제로 재등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내진입 실패 불구 가능성 발견

민노당이 재기를 다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6대 총선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깔려 있다. 비록 원내진입은 못했지만 분명한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다. 민노당은 21명을 출전시켜 지역구 평균 13.1%의 지지율을 얻어냈다.

1992년 6.5%의 두배가 넘는다. 득표의 양상도 판이했다. 울산북구에서 최용규 후보가 1위와 563표 차로 석패하면서 한나라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권영길 대표는 경남 창원을에서 출구조사 1위를 기록하다 2위로 밀리는 등 선전을 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미래이고 원내진입 실패는 현실이다. ‘선거는 결과가 전부’라는 것을 민노당도 인정한다. 민노당이 분석하는 패인은 크게 4가지. 선거구도가 지역·양당구도로 흐른 게 첫째다. 둘째는 ‘선거지형’이 불리했다는 것. 셋째 노동자 계층의 응집력이 아직 약했고 마지막으로 선거전략상의 혼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역·양당구도는 영남에 주력한 민노당의 노선을 밑둥부터 흔들었다. 영남권이 반DJ로 확실히 결집된 데다 남북 정상회담 합의 발표가 겹치면서 민노당의 생명선이 끊겼다는 분석이다.

울산북구 후보 경선에서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을 지낸 이상범 전울산시의원이 떨어진 것도 한 원인이라고 민노당측은 말했다. 최용규 후보가 나오면서 현대자동차 노조원의 표를 흡수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김 부대변인은 그러나 “후보경선 원칙이 확고한 만큼 결과적인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기대했던 ‘1인2표제’가 무산되고 후보기탁금을 2,000만원으로 배증시킨 선거법도 진보정당에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른바 선거지형상의 문제다. 권영길 대표는 당초 1인2표제를 염두에 두고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서려 했다가 1인1표제로 선거법이 확정되면서 막판에 지역구 후보로 돌아섰다. 지역구 결정과 지역구 활동이 늦어져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상외로 낮았던 노동자계층 지지

노동자 계층의 지지도 예상외로 낮았다. 일반 노동자는 물론이고 지지를 선언했던 민주노총까지 지역구도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민노당은 “노동자들이 아직은 계층보다 지역주의에 강하게 끌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제일 큰 표밭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득표수가 전체 노조가입 노동자수에 훨씬 못미친 선거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당비를 내는 당원 역시 목표했던 3만명의 절반에 못미치는 1만4,200명에 머물렀다.

민노당은 창당작업의 지연과 지역편중을 선거전략상 문제로 지적했다. 선거를 겨우 석달 남겨둔 1월말에 창당해 지역구에서 신뢰를 획득하는데 차질을 빚은 것이 첫째다. 아울러 전국적 활동보다는 교두보 확보를 위해 전략지역에 집중하는 바람에 수도권에서 쟁점을 만들지 못한 점도 자성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민노당에게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다. 한정된 지지세력과 미미한 당력으로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16대 상황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민노당 중앙당이 4·13 총선을 앞두고 세운 전략은 세가지. 공단 밀집지역인 울산, 부산, 창원의 ‘영남벨트’에 당력을 집중하는 것이 우선. 나머지는 보수정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면서 각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탈계급정당으로 이미지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중 첫째와 셋째는 사실상 모순되는 점이 적지 않았다. 대중정당을 지향하면서도 노동자 계층을 주요 타깃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민노당의 고민이었다.


상향식 공천, 기성정당에 자극제

그러나 민노당은 16대 총선을 통해 부정할 수 없는 한가지 공헌을 했다. 각 지역구에서 후보자를 경선으로 공천하는, 이른바 ‘상향식 공천’을 관철한 것이다.

울산북구의 낙선도 어찌보면 공천원칙을 지킨 것과 무관치 않다. 민노당은 21개 지역구 모두 상향식 공천으로 후보를 냈다. 상향식 공천은 앞으로 하나의 모델로서 기성정당에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민노당의 원내진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대중성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선거 직전에 창당해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과성 정당’으로 유권자에 비쳤다는 이야기다.

이같은 인식은 2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 보수적 유권자층을 설득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의 당명에 든 ‘노동’이란 용어도 중산층의 거부감을 유발한다는 견해가 있다. 민노당 내부적으로 당명 개정을 놓고 논란이 있지만 아직 대세는 당명유지라는 게 당 관계자의 이야기다.

민노당의 최대 과제는 진보정당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중산층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과제를 풀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언론의 기성정당 편중보도를 극복하고 자신을 유권자에게 알릴 수단을 강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민노당 스스로가 제1 덕목으로 강조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법밖에 없다. 다시 말해 철저하고 지속적인 지역구 관리다.

서울 노원갑에서 출마했던 이상현씨는 이번 선거에서 득표율 8%를 기록했다. 이씨는 “다시 4년뒤를 겨냥하고 있다”며 “지구당 사무실을 계속 가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6대 총선은 진보정당이 한국 사회에서 선거다운 선거를 치른 첫 선거’라는 평가를 인용하면서 17대 총선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우리는 계급과 진보라는 지평으로 당의 기반을 넓혀갈 것이다. 2004년이면 양김(兩金)이 퇴진하고 새로운 인물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가 높아질 것이다.”

민노당은 16대 총선에서 분명히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4년후 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이 가능성을 현실로 바꿀지 여부는 중간에 놓인 6·8 지방보궐선거와 2002년 지방선거가 말해줄 것이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4/30 15:27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