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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만에 체포된 미국판 '장발장'

베트남전이 끝난지 30년. 대학시절 반전시위에 참여했다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보석기간중 달아나 28년동안 전혀 다른 사람의 행세를 하며 시의원까지 출마했다가 신원이 들통난 한 남자의 기구한 인생역정이 화제가 되고 있다.

미국판 ‘장발장’의 주인공은 하워드 미케닉(52). 게리 트래드웨이라는 이름으로 보수색이 강한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서 건강식품점과 호텔을 운영해온 하워드는 환경관련 시민단체 활동에도 열심이었으며 그동안 수입의 4분의1을 자선단체에 꼬박꼬박 기부하는 등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하워드의 수배전단에는 그를 ‘무장했으며 위험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애리조나주 프로랜스의 연방교도소에 수감중인 하워드는 오히려 나이든 보이스카웃의 인상을 주었다. 교도소에서 뉴욕타임즈 매거진의 기자를 만난 하워드는 3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 회상에 잠겼다.

마침 이날은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을 캄보디아까지 확대키로 결정한지 30년이 된 날이었으며 5월4일은 캔트 주립대학에서 베트남전 반대시위하던 학생 4명이 주방위군의 총에 맞아 숨진 날이기도 하다.


반전시위로 유죄판결, 보석기간 중 도중

당시 대학생 시위대는 32개 대학의 학군단 건물을 불태웠다. 세인트 루이스의 워싱턴대학 학군단 건물도 활활 타고 있었고 이를 바라보는 학생들 중에는 이 대학 4학년 하워드도 끼어있었다. 누군가 화재진압을 하던 소방관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지만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하워드는 용의자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8년 대학가 시위를 막기 위해 제정된 시민복종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최초의 케이스였다. 하워드는 보석기간중 도주했고 28년이 지난 올해 2월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서 붙잡혔다.

너무 어리숙했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대담했던 것일까. 하워드는 스코츠데일 시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지역신문의 기자에게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그는 왜 출마했던 것일까. 하워드는 “나의 과거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대학시절 하워드를 아는 사람은 그를 아주 조용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타입으로 인식하고 있다. 워싱턴대 4학년때 룸메이트였던 영화제작자 필립 코치는 “하워드는 리더스타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시 워싱턴대 학생들은 학군단 훈련과목에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었다. 1970년 3월 대학당국은 법원으로부터 앞으로 모든 시위를 금지하는 명령을 얻어냈다. 그러나 법원의 명령도 1970년 5월4일 그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아마 그 무엇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전국 250개 대학생이 동맹파업에 들어갔고 수천명의 주방위군이 배치됐다. 워싱턴대에도 3,000여명의 학생이 모여 학군단 건물이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불을 끄기 위해 들어온 소방차는 학생들에 의해 뒤집혔다.

하워드도 여자친구와 함께 시위대에 있었다. 하워드는 화염병이나 돌을 던진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시위금지명령 위반죄로 4개월10일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이때 경험으로 그는 나중에 도주를 결심하게 됐다.

하워드는 “전역 군인 출신인 교도관들은 반전시위로 들어온 학생을 심하게 다루었고 그중 한 명은 ‘할 수만 있다면 너를 끌고 나가 총으로 쏴 죽이고 싶다’고 위협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피닉스서 새로운 이름으로 살다 체포

하워드는 또 3명 이상 모인 집회에서 소방관이나 공무원의 법집행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시민복종법 위반으로 연방법원의 재판을 받았다.

검찰측 증인 19명중 사실상 하워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법대생 도날드 버드(1983년 사망)의 진술도 신빙성이 없었다. 처음에 그는 하워드의 손에 화염병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가 3~4m 뒤에 서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진술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평상시 같으면 훈계나 듣고 끝났을 일로 하워드는 5년형을 선고받았고 1972년 연방대법원에서 형이 확정했다. 보석상태였던 하워드는 아버지에게 연락하겠다는 편지만 남겨놓고 달아났다.

하워드는 열두살부터 모은 우표 등을 모두 팔아 모은 돈 4,000달러를 들고 피닉스로 갔다. 무엇보다 피닉스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하워드는 대학도시 탬프에 정착했다.

게리 트래드웨이라는 새로운 이름에 익숙해지기까지 6개월이 걸렸고 경찰에 체포되는 악몽에서 벗어나는데는 10년이 넘게 걸렸다. 하워드는 건강식품점 창고정리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독립해서 전국적 건강식품 지역대리점을 운영하게 됐다.

채식주의자가 된 그는 또 유기농 식품 구매모임에 가입했다. 1970년대 그 모임은 기업으로 성장했고 그는 이사가 됐다. 1977년 이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여대생 잉그리드 골드를 만나 1980년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았지만 1985년 이혼했다.

하워드는 사업수완도 있어 중고자동차를 보수해 파는 장사를 해 많은 돈을 벌자 12개짜리 아파트형 호텔을 구입해 세를 주었다.

5년전 하워드는 지역 격주간지에 낸 ‘담배를 피지 않는 채식주의자 사회운동가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온 재닛 그로스맨이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더욱 대담해졌다. 그는 지역신문에 투고했고 기업의 선거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공명선거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케이블 TV에 출연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워드는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지역을 위해 좀더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시의회 선거에 나섰다.

스코츠데일의 트리뷴지 민완기자인 패니 오버톤은 통상적인 출마자 프로필을 쓰기 위해 하워드를 만났지만 하워드는 안절부절했다. 인터뷰 중 하워드의 옷은 금방 땀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하워드는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하면서 고아라며 더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두번째로 오버톤을 만난 자리에서 하워드는 자신이 도망자라는 사실을 실토하고 비밀을 지켜달라고 울먹이며 간청했다. 그러나 오버톤은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공직출마자인 만큼 기사를 써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워드 행동에 엇갈리 평가

하워드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워드의 대학 교수였던 카터 리바드씨는 하워드의 보석 보증을 섰다가 집을 날릴 뻔 했지만 “민간인에게 네이팜탄을 투하한 사람에게는 훈장을 주고 화염병을 던진 학생한테는 5년형을 선고한 게 과연 합당한가”라며 “정작 감옥에 가야할 사람은 하워드를 기소한 사람들”이라고 흥분했다.

그러나 당시 대학 소방관으로 현장에 달려갔던 밥 메트칼프는 “그는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워드는 교도소에 수감중에 치러진 시의회 선거에서 1,300표를 얻었지만 이 곳에서도 여론은 크게 갈렸다. 지지자들은 28년간 자선을 베풀면서 살아온 점을 감안해서라도 하워드에 대한 처벌은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스코츠데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민간단체는 거짓 이름으로 선거에 나서고 모금을 한 것은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검찰도 하워드에게 선거법 위반과 징역 5년형까지 가능한 유권자등록 위조, 10년형까지 가능한 여권서류 위조혐의를 함께 적용할 계획이다.

처음에 그냥 복역을 하는 것이 나을 뻔 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때 나는 올바른 결정을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songyh@hk.co.kr

입력시간 2000/05/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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